불감증에 걸린 현대인

바쁜 도시 생활에 쫓겨 사는 우리들은 어느덧 느끼고, 체험하고, 감탄할 수 있는 마음을 잃고 살아갑니다.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가장 큰 병은 다름 아닌 불감증입니다. 이들은 머리 속에는 많은 지식과 생각들이 있지만 자기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무감각할 뿐만 아니라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겨울산에 함박눈이 내려도, 눈꽃이 피어도, 그 아름다운 계절을 느끼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벌까 하는 머리만 쓰며 삽니다. 어릴 적에 눈이 내리면 들로 산으로 뛰어 달리며 연도 날리고 썰매를 타고 다녔는데, 요즘 아이들은 방에 갇혀서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돈을 주고받는 일회용 사랑에 익숙해져 사랑하는 님이 내게로 다가와 입맞춤을 해도 그 달콤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배고프고 헐벗은 가난한 이웃이 쓰러져 손을 내밀어도 무감각하게 그 자리를 지나갈 뿐입니다. 아프간에서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이 폭탄에 맞아 죽어 가는 것을 보고도 놀라지도 분노를 느끼지도 않습니다.

가슴과 머리로 살아가는 사람

그것은 현대인들이 무엇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가슴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해방신학자 중에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은 가슴(파토스)과 머리(로고스)로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먼저 가슴(파토스)으로 느끼고, 머리(로고스)로 판단해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먼저 가슴으로 느끼고 나서 저 산을 어떻게 오를 것인가 머리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머리가 먼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아, 저 여인은 참 아름답구나”하고 먼저 가슴으로 느낌이 팍 오지요. 그리고 나서 어떻게 저 여인의 전화 번호를 알아낼까, 어떻게 해서 만나자고 할까 등등 머리 속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슴 없이 머리로만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 여자가 돈도 많고 집안도 좋고 내 출세에 지대한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한번 꼬셔봐야지.” 그러나 그런 만남은 100% 불행해 지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것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할 때도 먼저 머리로 계산을 하고 나서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뭔가 필이 오고 나서 나중에 머리로 계산을 하고 수지가 맞으면 행동으로 옮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람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먼저인 것입니다.

머리로만 살아가는 사람

오늘날 현대인들은 가슴은 잃어버리고 머리만 남았습니다. 정치인들이 그렇습니다. 국민의 아픔, 국민의 걱정거리, 국민의 바램은 아랑곳하지 않고 온통 당리당략에 골몰하며 사는 인간들이 정치인입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까지도 머리만 비대해졌습니다. 십일조를 하고 헌금을 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문에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러 감옥에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머리로 살아가는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부모들은 자식들을 모두 머리만 뛰어난 사람으로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비싼 과외를 보내고 학원을 보내고 해서 가슴은 한없이 빈약하면서 머리만 비대한 아이들을 만들려고 합니다. 나중에 그런 아이들이 성장하면 또 머리로만 살아가게 되고 부모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

신앙인은 모름지기 머리보다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슴으로 산 대표적인 신앙인은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그는 로고스로 산 사람이 아니라 파토스로 산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로부터 외투 하나 물려 입었을 뿐 가난과 결혼해서 평생을 청빈하게 산 파토스의 사람이었습니다. 들꽃과 이야기를 하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향기를 맡았으며, 자기를 온전히 비워 그리스도를 닮아가려 했습니다. 가슴으로 산 그를 사람들은 성자라고 칭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시퍼런 국가보안법이 살아있고 철조망이 가로막혀 있지만, 홀로 휴전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넘어서는 안되고, 넘을 수 없다고 여기는 휴전선 철조망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남과 북의 분단선을 훌쩍 넘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늦봄이 머리로 행하는 일이 아니라 가슴으로 넘은 것입니다. 이렇게 가슴으로 분단선을 넘은 그에게 사람들은 통일의 사도라고 칭했습니다.

이 땅에 어머니들은 머리로 살지 않고 가슴으로 사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어린 자식과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살아왔고, 그 힘으로 이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었습니다. 이 어머니들은 예수를 믿어도 머리를 써가며 잔꾀를 부리며 믿지 않고 두 무릎으로 예수를 믿었습니다. 한국의 새벽기도는 어머니들의 가슴으로 정성을 드리는 성소가 되었습니다.

옛날 인디언들은 넓은 초원을 말을 타고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다가 초원 한가운데 말을 세워 놓고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머리와 몸이 너무 앞서와서 아직 쫓아오지 못한 가슴과 영혼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성이란 머리와 가슴이 일치하는 것, 너무 앞서간 머리를 잠시 식혀 아직 오직 못한 가슴을 기다리는 것이 바로 신앙훈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슴과 십자가, 그리고 걸레

머리를 주로 쓰는 사람은 손이 게을러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습니다. 참 가슴의 소유자만이 십자가를 능히 짊어질 수 있습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은 손이 먼저 나가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가슴으로 느끼고 바로 손이 나아갑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이것저것 궁리한 끝에 자기에게 이로울 때만 손이 나갑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 머리가 좋은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고, 도마는 주님을 의심했습니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서 손과 발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대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그나마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고 희망이 있는 것은 머리로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손과 발로, 따스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구체적인 모습을 땟구정물이 줄줄 흐르고 갈기갈기 떨어지고 방 한구석에 내팽개쳐진 걸레에게서 봅니다. 우리 시대에 십자가는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더럽고 오염된 곳을 닦아내는 걸레입니다. 십자가가 죄 많은 우리를 회개하게 해 주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듯이, 걸레는 자기를 희생하여 더러운 곳을 닦아 세상을 아름답게 해 줍니다.

안도현이라는 시인이 쓴 글중에 아주 짧은 시가 하나 있습니다.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는 건
걸레가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기 몸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방안을 깨끗하게 하는 걸레처럼,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으신 분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언제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늘진 곳에 홀로 앉아 걸레처럼 가족을 위해 헌신할 뿐입니다. 차가운 마루 한 구석에 던져져 얼어 비틀어진 걸레가 바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강남향린교회에서 걸레를 가장 많이 들고 있는 부서가 어디입니까? 바로 여신도회입니다. 여신도 회원들은 교회의 구석구석을 걸레를 들고 다니면서 닦고 닦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위하지 않고 어린이부 어린이에서부터 나이 드신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보살필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그늘지고 소외된 이들까지 살피고 따스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합니다. 아마도 여신도회가 없다면 오늘날처럼 강남향린교회가 아름답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걸레와 성자 어머니

여러분들도 걸레질을 한두 번 해보아서 잘 알겠지만, 허리를 굽히고 두 무릎을 꿇고 한 손을 집고 걸레질을 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제 어머니가, 제 아내가 집에서 걸레질을 하는 것을 보노라면, 차라리 ‘저것은 기도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가끔 걸레질을 좀 해 보는데 그것은 기도하는 것보다 더 힘이 듭니다.

마치 중세 수도사들이 두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며 참회하는 심정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 어머니가 걸레를 들고 바닥을 닦고 벽을 닦고 유리창을 닦아 집안을 아름답게 닦는 걸레질이야말로 거룩한 종교적 수행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찾고 따라야 할 거룩한 이, 곧 성자를 먼 곳에서 찾지 않습니다. 바로 제 어머니가 성자요, 제 아내가 성자요, 바로 걸레를들고 더러운 곳, 그늘진 곳을찾아가 따스하게, 아름답게 닦아주는 여러분들이 성자이십니다. 성자란 누구입니까?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희생

하고 자기를 헌신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과 평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이 아닙니까? 바로 걸레처럼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여 하늘의 평화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오늘 성서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평화를 이루려 헌신하는 걸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대에 우리가 주님을 믿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직접 걸레를 들고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닦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지극히 인간적인종교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우리 에게 해탈(解脫)이나 도통(道通)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뿐입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내 십자가는 누가 지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당신이 직접 짊어지고 가셨듯이, “너도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내가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내가 내 십자가를 나 자신이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하는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 의 핵심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지셨으니 나는 안 져도 된다, 예수께서 대신 지신 십자가로 나는 가만히 앉아 기도만 하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십자가는 있지만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갈 참다운 신앙인은 없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교회에는 예수의 십자가는 사라졌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과 헌신의 삶 없이 영광과 축복만을 부르짖는 교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사칭하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 불과합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없고, 예수의 삶이 없고,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는 한국교회, 오직 예수의 보혈의 피만 부르짖는 교회에서 우리는 예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상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걸레가 되어야 할 교회

교회는 이 세상에 걸레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고 내어놓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닦고 닦는 걸레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은 어느 날 갑자기 성령의 불을 받아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면서, 우리가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걸레가 되어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걸레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신앙은 타력적, 이타적, 의존적 신앙이 아니라 자력적, 주체적 신앙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진정제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삶의 고통을 잠시 잃게 해주는 각성제, 진통제가 아닙니다. 삶의 깊은 문제들에 대하여 즉각적인 해답을 주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친히 두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것, 걸레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걸레로 오셨습니다. 죄 많고 더러운 마음을 가진 우리 인간 세상에 오셔서 하늘의 말씀으로 우리를 닦아주시고, 병들고 힘없는 이들을 다시 세우시고, 마침내 십자가를 친히 짊어지심으로 우리에게도 걸레와 같은 삶을 살아 이 세상을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로 가꾸라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걸레로 마음을 닦아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삼으십시오

사랑하는 강남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걸레의 삶을 살아 가야 할 우리에게 가장 잘 닦아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그 곳은 다름 아닌 우리의 마음입니다.마치 우리의 어머니가 신새벽에 장독대에 올라 아주 깨끗한 하얀 걸레로 장독을 정성을 다해 닦아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닦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닦고 닦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질그릇이지만, 그 질그릇 안에 보화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계십니다. 내 마음이 더럽고 오염되어서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뿐 주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계십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의 마음을 말씀의 걸레로 닦고 닦으면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의 모습을 밝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여러분은 거룩하고 신령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를 이 세상에 속해 있으나 모두들 하늘의 시민권자들이라 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하는 일은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거룩한 일입니다. 삶의 성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걸레가 온전히 자기를 비워 주님을 모시는 삶을 사는 것처럼, 사랑하는 여러분의 삶도 성자 걸레처럼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희생의 삶을 통해 더러운 곳, 그늘진 곳, 아프고 고통받는 곳으로 가서 친히 자신이 걸레가 되어 그들을 닦아주고 위로 해주고 치유해 주고, 그래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나가시는 여신도회와 강남향린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아멘.

기도는 나를 살리고 타인을 살리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 기도가 이웃을 살립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은 내 소망, 내 꿈, 내 생각을 이루는데 있지 않고,
더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내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기도는 내 삶의 일부, 내 시간의 일부를 드리는 지극히 습관적이고 요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혁명적인 행위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야말로 옛사람을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새 사람이 되는 종교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자신의 것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에 대해 죽는 행위이며,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거듭남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이 세상에 속해있으나 이 세상에 갇혀 있지 않고,
이 세상의 사람이나 하느님의 사람이 되게 하며,
이 세상에 머물러 있으나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는 위대한 신비입니다.
그래서 기도란 그 어떤 것에도 매이거나 갇혀 있게 하지 않고
끊임없이 걷는 길이요 순례의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여정 동안 언제나 새로운 하느님을 대면하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더 필요한 쪽은 누구입니까?
우리입니까?
하느님이십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 더 고생하는 쪽은 누구입니까?
우리입니까?
하느님입니까?"

두려움없는 마음으로 말하기를 "하느님이십니다."
기도는 우리보다 하느님이 더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주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느님은 우리에게 의존하십니다.
십자가에 넘어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며 나약하신 하느님은 철저히 사랑이 필요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인 동시에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갈망입니다.

기도란 한마디로 하느님 안에서 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내 안에 임재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기도는 하느님이 내 안에 살아계셔서 나를 살리고 나를 이끄시는 하느님임을 알게합니다.

그래서 기도란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기도 훈련을 통해
우리는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 눈뜨게되며,
하느님을 내 맥박과 내 호흡 속으로,
내 생각과 내 감정 속으로,
청각과 시각과 촉각과 미각 속으로
우리의 전 존재로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그래서 비로소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머리의 생각과 가슴의 체험을 모두 비울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기도하는 자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하느님의 영임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는 호흡과 같습니다.
우리의 호흡이 중단되면 목숨을 잃듯이 우리가 기도를 중단하면
우리의 영혼은 곧 죽은 것입니다.

바울의 권고처럼
밤이나 낮이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일할 때나 놀 때나,
쉬지 않고 중단 없이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기도는 곧 삶입니다.
기도는 먹고 마시는 것,
움직이고 쉬는 것,
가르치고 배우는 것,
놀고 일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스며듭니다.
기도는 우리가 있는 곳에 하느님도 함께 계시다는 끊임없는 인식입니다.
이렇게 기도의 삶은 바울의 고백처럼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갈 2:22)입니다.

이제 비로소 기도를 통해서 내 삶이 거룩해지고 아버지께서 사시는 은총의 삶이 됩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이란 내가 지금 이 세상에 속해 있으나 하늘의 삶을 살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사는 하느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이 이 거룩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우리는 지금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이 호흡을 하듯 기도하는 삶이 되시고,
삶이 기도요 기도가 곧 삶이 되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심으로
영생의 삶을 사는 성도들 되시기 기원합니다.  아멘.

하느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신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밥상에 앉아 생명의 밥이신 주님을 내 안에 모시며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처럼
오늘 이 아침에
뒷간에 홀로 앉아
똥을 눌 때에도 기도하게 하옵소서.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내 뒷구멍으로 나오는 것이오니
오늘 내가 눈 똥을 보고
어제 내가 먹을 것을 반성하게 하옵시고
남의 것을 빼앗아 먹지는 않았는지.
일용할 양식 이외에 불필요한 것을 먹지는 않았는지.
이기와 탐욕에 물든 것을 먹은 것은 없는지.
오늘 내가 눈 똥을 보고
어제 내가 먹을 것을 묵상하게 하옵소서.

어제 사랑을 먹고 이슬을 마시고 풀잎 하나 씹어 먹으면
오늘 내 똥은 솜털구름에서 미끄러지듯 술술 내려오고
어제 욕망을 먹고 이기를 마시고 남의 살을 씹어 먹으면
오늘 내 똥은 제 아무리 힘을 주고
문고리를 잡고 밀어내어도
똥이 똥구멍에 꽉 막혀 내려오질 않습니다.

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똥 한번 제대로 누지 못하며
살아가는 가엾은 저를 용서하소서.

내일 눌 똥을 염려하지 않고
오늘 내 입으로 들어갈
감미롭고 달콤함에 눈이 먼
장님 같은 내 인생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느님,
어제 먹은 것을
오늘 비우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뒷간에 홀로 앉아 똥을 누는 시간은
내 몸을 비워 바람이 통하게 하고 물이 흐르게 하고
그래서 하느님 당신으로 흐르게 하는 시간임을 알게 하소서.

오늘 똥을 누지 않으면
내일 하느님을 만날 수 없음에
오늘 나는 온 힘을 다해
이슬방울 떨구며 온 정성을 다해
어제 내 입으로 들어간 것들을 반성하며
똥을 눕니다.

오늘 내가 눈 똥이 잘 썩어
내일의 양식이 되게 하시고
오늘 내가 눈 똥이 허튼 곳에 뿌려져
대지를 오염시키고,
물을 더럽히지 않게 하옵소서.

하느님
오늘 내가 눈 똥이
굵고
노랗고
길으면
어제 내가 하느님의 뜻대로 잘 살았구나
그렇구나
정말 그렇구나
오늘도 그렇게 살아야지
감사하며
뒷간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오게 하옵소서.
신앙이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신앙이란 살아있는 그 무엇이다. 학문의 언어로 혹은 교리나 교회 지도자들이 획일적인 말로 설명하는 그 이상의 것이다. 우리의 머리나 관념으로 알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란 몸의 언어요, 삶이요, 생명이다.

신앙은 흔히 교회 안에서 하는 것이며, 늘 교회와 연결되어 있으며 교회의 지도에 따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이란 우리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교리나 교회, 성경책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출발해야 하고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는 어디에 오셨는가? 경전 속으로 오셨는가? 교회 안에 오셨는가? 교리나 교회 지도자들의 입으로 오셨는가? 예수는 말구유에 오셨다. 말구유는 우리의 삶의 상징이다. 말구유는 밥을 나누어 먹는 밥통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온 가족이, 사랑하는 친구들이 밥통에 둘러앉아 밥을 나누어 먹는다. 밥을 나누어 먹는 밥통의 자리, 그것은 우리가 매일 몸 비비고 살아가는 일상의 삶의 자리이다.

예수께서는 33년의 공생애를 사시면서 성경이나 성전, 교회 지도자들의 말에 머물지 않으시고, 가난하고 병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자리에 머물며 그들과 더불어 사셨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주님은 바로 우리의 생활 속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생활(生活)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생활(生活)을 한다. 생활(生活)이란 '살아서(生) 움직임(活)'을 의미한다.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모든 행위가 곧 생활이다. 생명(生命)의 활동이 곧 생활(生活)이라 할 것이다.

농부가 들녘에 나아가 일하는 것, 어머니가 부엌에서 밥짓는 것, 아이가 뒷동산에서 뛰어노는 것, 이른 아침에 참새가 짹짹 소리내며 잠을 깨우는 것, 부엉이가 달빛 아래에서 부엉부엉 우는 것, 이쪽 시냇가에서 저쪽 동산까지 무지개 다리가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 이 모든 아름다운 생명의 몸짓들이 생활이다.

이렇게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생명체들이 각각의 고유한 생명을 활동을 통하여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의 마을 살림터에서부터 무궁한 우주만물에 이르기까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움직임이 생활이라 할 수 있다.

각 생명들의 활동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생명 창조자인 하나님이시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우주만물 속의 뭇생명에게 더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생명 활동을 해 오신 생명의 주관자시요, 모든 생활의 생활자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생활자로 부름을 받았고 생명을 살리는 생활에 참여한다. 생활자는 생명의 활동을 통하여 궁극적인 구원에 이른다. 생활이란 생활자가 생명의 자유롭고 풍성하며 아름다운 몸짓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는 생명체들의 구원방식이다. 그러기에 생활이란 신앙의 출발이며 종착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모시고 생활하셨다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모신 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예수는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씀하셨고 자기가 하는 일은 자기의 일이 아니라 예수 안에 계신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일이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요, 우리의 신앙의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생명의 말씀이다. 그것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너희 안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 "내가 하는 일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몸소 하시는 거룩한 일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 4절에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셨다. 그것은 예수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하나님을 모신 거룩한 존재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2장 33절에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것 또한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들도 역시 그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거룩한 존재하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이다.

우리가 내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되면 우리의 몸은 거룩해지고, 우리의 삶도 거룩해지며, 우리의 생활은 신령해진다. 우리가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일, 손가락 한 번 움직이는 일, 눈 한 번 떴다가 감는 일, 들녘에 나아가 땀 흘려 땅을 일구는 일,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일, 이 모두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각성된 영성을 통하여 우리의 생활은 거룩해지며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사시는 거룩한 삶이 되는 것이다.

이제 삶의 성화, 생활이 거룩해진다. 들녘에 나아가 일하고 밥 먹고 설거지하고 똥 싸고 일하고 바느질하고 아기 낳고 기르는 모든 일상의 생활이 거룩해진다. 뿐만 아니라 내 어머니, 내 아버지의 일이 거룩하며 내 이웃과 친구의 일이 거룩하다. 언덕 위 꽃 한 송이, 시냇물에서 물장구 치는 물방개가 거룩하다. 논과 밭의 알곡이 거룩하며 산과 강과 바닷가 거룩하다.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지 않고는 어떤 생명의 활동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생활은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생활)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그것을 잊지 않고 내 몸을 소중하고 거룩하게 여기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 할 수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