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없는 희망

준비 없는 희망이 있습니다

처절한 정진으로 자기를 갈고 닦아

저 거대한 새벽을 기어코 뛰어넘을

진정한 자기실력을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 없는 준비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해가는데

세상과 자기를 머릿속에 고정시켜

현실 없는 준비에만 몰두하는 자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나눔과 성장

  언 땅이 풀리는 해토(解土)의 절기가 오면 흙마당가에 쪼그려 앉아
  얼음발 속에 뜨겁게 자라는 여린 새싹들을 지켜보느라 눈빛이 다 시립니다
  언흙을 헤치고 나온 새싹들은 떡잎이 둘로 나뉘면서 자랍니다

  나뉘어야 자라는 새싹들

  그렇습니다 나누어야 성장합니다
  커지려면 나누어야 합니다
  새싹도 나무도 나뉘어야 자라납니다
  사람 몸도 세포가 나뉘어야 성장합니다
  커진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본성입니다
  커나가는 조직은 정보와 지식, 비전과 자유와 책임을 잘 나누어
  함께 공유하는 만큼 멈춤 없는 성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누어야 커지고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나누어야 서로 이어지고 함께 모여들어 커질 수 있습니다
  크다는 것은 하나를 이루어낸다는 것이고
  큰 사람이란 나누어 쓰는 능력이 큰 사람이고
  크게 나눔으로 하나를 이루어내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잘 나누어 상대를 키움으로 자기도 커나가는,
  지공무사(至公無私)의 사람이 아닌 지공지사(至公至私)의 사람입니다
  나누지 않으면 성장이 정체됩니다
  나누지 않을 때 싸움이 생기고 분열이 생깁니다
  나눔만이 나뉨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누려면 나눌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늘 새롭게 나누어줄 삶의 감동과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 학습한 지식과 정보가 있어야 하고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보살펴줄 시간과 물질과 건강이 있어야 나누려는 마음도 자라납니다
  함께 나눌 가치 있는 일과 희망과 능력이 생겨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눔과 동시에 자기를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크게 나누기 위해서 먼저 나눔과 함께
  자기 자신이 세상과 이어지고 몸통하여
  내 몸과 내 큰 몸이 하나로 창조적 맴돌이를 이루어야 합니다
  천 골짝 만 봉우리 물을 받아들여 큰 물둥지를 이루어야
  너른 들녘을 푸르게 피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선 자리에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땀흘려 일하고 공부해야
  자기 안으로 흘러드는 물길을 낼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맑은 눈 뜨고 자기를 불살라가는 투혼의 불덩이어야
  나눈 만큼의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나눔은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성공한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눔은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가난을 나누는 것입니다

                                                                                 박노해 『사람만이 희망이다』"나눔과 성장" 中…

아름다운 성공
 
강연장에서 신세대 학생들을 만나면 자주 물어오는 게 있다. 내 경쟁 상대가 누구냐는 거다.

경쟁이라니, 난 시험에서 20등 이상 해본 적이 거의 없는데, 입시에 떨어져 재수까지 하고도 겨우 야간 상고에 들어갔는데, 경쟁 소리만 들으면 지금도 엄청 떨리는데…….

"내 경쟁 상대요? 박찬호.박세리. " 그 순간 와우 웃음소리 박수소리. "아니 또 있어요. 빌 게이츠, H.O.T., 디카프리오. " 그러자 휘파람 소리에 힙합 몸짓까지 나오며 야단이었다.

박찬호.박세리는 이미 '국민영웅' 이다. 그들의 볼 하나 퍼팅 하나에 우리의 운명이 걸린 듯 손에 땀을 쥐고 텔레비전 앞에 모여든다. 이제 박찬호.박세리는 신세대들에게 삶의 목표이자 롤모델 (role model 본보기) 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성공한 사람을 좋아하고 푹 빠지게 돼요.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자기 힘으로 성공해 나라를 빛낸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이에요" 라고 뺨을 붉히며 외치던 소녀처럼 나도 박찬호.박세리를 정말 좋아한다.

마이너리그에서 암울한 시간을 뚫고 일어선 박찬호의 당당한 투구, 박세리의 탄탄한 다리와 흰 맨발의 투혼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박찬호가 몸쪽 직구에 정통한 투수로서 점점 유연한 컨트롤로 빛을 발하듯 그래, 나도 시대 과제와 고난을 정면 돌파하면서 안으로 잘 익어가리라.

박세리가 오직 골프만을 위해 골퍼의 몸을 만들어 가듯, 나 역시 진리 탐구를 위해 고도의 긴장과 집중을 유지할 수 있는 몸을 만들며 짐승처럼 달리기하고 공부하고 써나가리라 다짐하곤 했다.

나는 그들의 프로기질을 사랑한다.

프로농구 용병들이 섬세한 슛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포도주 한 잔도 거절하며 생수만 마시고, 댄스 가수들이 착지 동작에서 4분의 1박자만 틀려도 머리를 감싸고 자책하는 그 치열함을 좋아한다. 지옥훈련을 이겨내는 박찬호.박세리의 고독하고 처절한 열정에 나는 공감한다.

그들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영웅이다. 지치고 좌절한 우리를 위안하고 용기를 불어넣는 희망의 얼굴인 것이다. 민감한 지성으로 거침없이 솔직한 신세대들이 어찌 이들을 자기 인생의 목표이자 성공의 모델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지금 심각하다.

매스컴마다 박찬호.박세리를 높이 띄우고 찬탄할수록 뭔가 불안하다.

그들의 감동의 투혼, 그것은 무엇을 위한 투혼인가? 그들을 움직이는 건 무엇일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기에 온갖 고생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젊음을 빛내는 잘 생기고 예의바른 우리의 박찬호.박세리. 그러나 그들을 움직이는 스타시스템은 결국 '돈' 과 '인기' 가 아닌가.

그들의 눈물겨운 땀과 도전은 오로지 정상을 향하여, 대중의 인기와 관심을 향하여,끝없이 자신을 불태우는 연료가 아닌가.

그들처럼 일단 '뜨고' 나면 눈부신 자선 행위로 사랑과 인격까지 얻을 수 있다고 우리 모두를 환상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가.

무한경쟁의 세계 무대에서 정직한 노력으로 얻어낸 승리와 영예는 정말 값진 것이다.

그것은 끈적끈적한 연줄과 특혜로 이룬 우물안 성공과는 비교할 수 없다.

갖은 불리함과 차별을 딛고 세계에서 통하는 실력 하나로 이룬 '깨끗한 성공'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찬호.박세리들이 훌륭한 스포츠선수.연예인.컴퓨터기술자를 넘어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의 정신 권력으로 다가오는 건 심각한 문제다.

그들의 '아메리칸 드림' 이 눈 맑은 신세대의 가치관을 온통 지배해서도 안될 일이다.

일등은 오직 하나뿐, 최선을 다하고서도 우승하지 못하는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세계 정상이라고 하더라도 오직 그 분야에서 잠깐 영웅일 뿐, 스포츠나 연예나 컴퓨터 분야의 승자가 곧바로 인생의 승자는 아니다. 돈과 권력과 인기를 얻었다고 해서 그만큼 행복해지고 영혼이 깊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오직 박찬호.박세리.빌 게이츠.H.O.T.를 닮고자 하는 우리 시대의 광기 어린 성공 제일주의, 그 유일 사상은 무너져야 한다.

삶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가치들을 눈멀게 하는 화려한 불빛이라면 그것은 꺼져야 한다.

아이들이 서로가 서로를 경쟁상대로 삼으며 스타들을 자신의 성공 모델로 추구하는 것은 결코 그들 탓이 아니다. 박찬호.박세리 탓도 아니다.

"사람은 그가 응시하는 것이 된다" 는 말이 있다.

신세대들이 자기 인생의 목표로 삼고 싶고 닮고 싶은 참사람, 자기를 비춰 볼 매력 있는 거울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랑과 나눔과 진리 추구의 삶이 박찬호.박세리의 무용담만큼 멋지고 아름답게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감동의 사람을 내놓을 수 없고, 그런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한 우리의 나태와 무능이 문제인 것이다. 미래의 주인공인 신세대 속에서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성공' 의 본보기가 있어야 그들의 가치 중심이 잡힐 것이 아니겠는가.

지난 시대 깨어있는 지식인들이 개인의 출세보다 민중과 다같이 잘 사는 공동체를 이루자며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이라고 내걸었던 깃발, 그것을 다시 꺼내 드는 것은 때 맞지 않은 일이다.

빈곤의 평등과 무능의 평등을 선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시대에는 "한 사람의 열 걸음을 열 사람의 백 걸음으로" 만들어 가는 개인의 창조력과 나눔의 확산이 참된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각 분야에서 자기 실력으로 '뜨는' 개인이 되기를 주저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떴다' 라는 말은 출세했다는 말이다.

나갈 출 (出) 세상 세 (世) , 곧 세상으로 나선다는 것이다.

세상 속으로 민심 속으로 들어가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출세한 사람 대부분이 그러하듯 떴다는 것은 삶에서 뿌리가 들떴다는 것, 다시 말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에서 동떨어져 군림하는 위치에 선다는 말일 수도 있다.

'뜬다' 는 것이 자기도 모르게 죄가 되고, 뿌리 뽑힌 나무처럼 앙상하게 시들어 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진짜 산을 아는 사람은 등산한다고 하지 않고 입산한다고 한다. 더 높은 곳으로 경쟁하며 오르는 등산 (登山) 이 아니라 산 속으로 들어가 안기는 입산 (入山) 이라는 것이다. 산 속으로 들어가려면 지극히 작고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 발뒤꿈치로 자기 뿌리를 꾹꾹 딛고 걸어가야만 푸른 산 기운을 받아 오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삶에서 뿌리가 들뜨지 않으려면 성공을 위한 노력 못지 않게 무엇을 위한 성공인지를 늘 성찰해야 한다. 성공한 그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나의 성공이 내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들에게 무엇인지를 묻고 또 실천해야 할 것이다.

나의 경쟁 상대가 누구인가.

깊이 살펴보면 사실 경쟁 상대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관심은 누구와 싸워서 이기고 지는 것보다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행복해지는 데 있다.

사랑과 나눔에 무슨 경쟁이 있겠는가.

서로 다름을 긍정하고 서로 나누고 연대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승리가 아닌가.

그럼에도 굳이 경쟁 상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의 진짜 경쟁 상대는 나 자신" 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은 치열한 것인데 자꾸 착하고 옳음에만 안주하려는 나.
세상도 사람도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그저 원칙만 쥐고 변화를 거부하려는 나.
어제 이룬 것을 누리려 하고 다시 새벽에 길 떠나기를 주저하는 나.
사랑이 사무치면 그것을 이룰 실력을 더 키워야 하는데도 자기 한계에 머무는 나.

나의 경쟁 상대는 그런 나 자신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아침과 봄에 얼마나 감동하는가에 따라 당신의 건강을 체크하라.

당신 속에 자연의 깨어남에 대해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며,

이른 아침 산책의 기대로 마음이 설레어 잠에서 떨쳐 일어나지 않는다면,

첫 파랑새의 지저귐이 일으키지 않는다면 - 눈치채라

당신의 봄과 아침은 이미 지나가 버렸음을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해가 떠오릅니다

오늘 떠오르는 해는 오늘의 해입니다

이 세상에 같은 것은 두 번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은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지구는 단지 자전과 공전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는 끊임없이 확장하며 순환하고 있습니다

태양도 지구도 이동하는 공간 속에서 운동하고 있기에 시간이 생겨나고

시간 속의 모든 사물은 날마다 변화하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은 나날이 처음 열리는 새로운 날들이고

시간 속의 새로운 생각과 말과 행동과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단지 무디고 퇴화된 사고와 감성에 안주하는 사람만이

이 새로운 하루하루를 감동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감사할 주 모르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음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큰 감사와 은총인지를

나는 몇 번씩 죽음 앞에 세워지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어 습니다

가족과 함께 한 밥상에서 밥 먹는다는 게 얼마나 큰 자유이지 아십니까?

마냥 걸을 수 있고, 산을 오를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알몸을 만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아십니까?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지금자기가 얼마나 큰 보배를 갖고 있는지 모른 채,

그것을 즐기지도 못한 채,

봄을 찾는다고 천리만리 밖으로 떠도는 사람과 같습니다

봄은 이미 자기 집 울타리에 개나리꽃으로 살구꽃으로 피어 있는데

당신이 무감동하게 듣는 새소리를 듣고

"저 소리가 새소리라는 건가요? 참 듣기 좋으네요 저는 오늘 새소리를

처음 들어요"라고 감동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40세가 되도록 가난한 집 골방에 누워 있다가

'장애인 물놀이에' 나온 분이었어요

침침한 관속 같은 좁은 제 독방을 저는

〈감은암(感恩庵)〉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살아있음의 감사와 은총'이라는 뜻이지요

비록 무기징역에 침묵하면 정진하는 처절한 겨울 삶이지만

살아있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요한 기인지,

얼마나 큰 감사와 은총인지 모릅니다

하루하루가 감동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나쁜 습성입니다

둔감하고 안이하게 그저 흘러가는 생활입니다

나날의 무의미하고 반복되는 일상생활만큼 인간을 무디게 하고

감각기관과 정신과 감수성을 퇴화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두려워하십시오 쓰지 않는 감각기관은 퇴화하고 맙니다

인간의 코는 수천 가지 냄새를 구분할 수 있지만

도시 문명 생활을 하면서 그 기능을 쓰지 않아

지금은 수십 가지 냄새밖에 맡지 못하도록 퇴화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얼굴 표정을 과장하는 근육은 80종류나 되고 그것이 각각

무수한 조합을 만들어 무려 7천가지 표정을 짓는답니다

지금 당신은 몇 가지 표정으로 살아가십니까?

무엇이든 쓰면 쓸수록 진화하고 쓰지 않으면 퇴화하고 맙니다

항상 노래를 부르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항상 춤추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항상 웃음을 띄우십시오

항상 귀를 크게 열어놓으시고

칭찬을 해드리십시오

손으로 어루만져드리십시오

항상 새로운 것을 찾으십시오

아름다운 것을 찾아 즐기십시오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창조력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감동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더 이상의 영적 성장이 멈춰버린 사람입니다

감동을 잃어버리고 생기와 신명이 없는 사람은 미래가 없습니다

정치적 견해나 말로는 진보라고 하더라고 감성과 도덕과 생활 문화가

봉건성에 젖어 삶이 보수화하고 퇴보하는 사람입니다

온몸과 마음과 감성으로 열심히 감동하십시오 감동을 나누십시오

리더십의 핵심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능력입니다

감동을 잃어버렸다면 학습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항상 감동에 젖어들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의 안테나를 예민하게 닦으십시오


박노해/노동해방 시인


나라가 이렇게 어려울 때는 기다림의 등불을 켜고 깨어 있는 사람들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난 70년대에도 운동권을 종로 5가에 모아 보면 50명도 채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수가 양심과 진리의 불을 들면서 끝끝내 저 위대한 6월 항쟁을 만들어 냈고, 오늘 그래도 이만큼의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동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첫째, 불을 잘 밝히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서에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불을 켜고 있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과 자기 시대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는 것, 관심의 등불을 켜고 있는 것, 이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기 안에서 이웃의 고통, 자기 시대의 고통을 나누어서 품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그 고통과 상처가 너무 아파서 잠들래야 잠들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로, 늘 물음이 끊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좀더 좋은 세상은 없을까, 더 좋은 길이 없을까,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하나, 이 고통을 이겨내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고 항상 묻는 사람들, 그 물음이 그치는 순간부터 우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안주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사람이 추해지고 결국은 퇴보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향린교회에 와서 뼛속 깊이 사무쳤던 말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저는 너무 쉽게 했던 것 같습니다. 전국의 젊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다니는데, 이제 저는 그런 말은 함부로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빛이라고 하는 것은 어둠을 밝히면서 자기의 몸을, 자기의 인생을 차디찬 식은 재로 만들고 맙니다. 날이 밝으면 쓸어 버려지는 식은 재가 됩니다.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짜고 흴 때는 정결하고 거룩하게 빛나지만 그것이 썩음을 방지했을 때는 비린 물로 버려지는 운명이 됩니다. 그런 식은 재나 더럽고 비린 물로 버려지는 자기 운명을 정말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만이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을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감옥에서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질문을 해보면, 대개 ‘행복’이라고 대답합니다. 행복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감옥에는 도둑만 오는 곳이 아니라 대학 총장도 있고, 교수, 장관, 국회의원, 대기업체 사장, 목사, 스님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오는 아주 좋은 학교입니다. 저는 지난 8년 동안 국비 장학생으로 유학을 다녀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감옥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에게 무엇이 가장 부러워 보이더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세 가지로 압축이 됩니다.
첫째는 자기 몸을 열심히 사용해서 땀을 흠뻑 흘리고 돌아오는 모습이 가장 부러워 보인다고 합니다. 역시 첫째는 건강 가치입니다.
둘째는 자기 가족, 친구들과 식사하면서 오손도손 화목하게 웃고 있는 모습, 그게 가장 행복해 보이더라 합니다.
셋째로는 자기의 소명으로 느끼는 일, 정말 자기가 그 일을 통해서 전심 전력으로 몰두할 수 있는 자기 일을 가진 모습이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어려운 경험을 몇 번 겪으면서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죽을까 하는 것이 자기 삶의 가치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짐승같고 추악한 사람도 일생에 한번은 크게 깨치는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죽음 앞에서입니다. 저는 여러 번 죽음 앞에 세워진 적이 있습니다. 지하 밀실에서 54명의 건장한 고문자들이 3교대로 고문을 하는데, 책상 같은 곳이 고무테로 다 씌워져 있고 벽이나 바닥도 다 방음이 되어 있습니다. 온갖 고문에 찢길 대로 찢겨, 어느 순간부터는 헛소리가 나오게 됩니다. 거기서 제가 말을 하면, 저를 도와주신 많은 분들이 다치게 되므로 도저히 안 되겠구나 생각하고 하룻 동안 기도를 하면서 마음 준비를 하고 자결을 시도한 적이 있습다. 그리고 또 사형을 언도받았을 때 집행일까지 150일 남아 있었습니다. 지상에서 확실한 날이 150일 있다는 게 얼마나 희망적인지 몰랐습니다. 태어나서 결국 깨치는 게 중요한데, 150일이면 내가 깨칠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죽음을 묵상하면서 하나하나 정리를 하고, 정말 발가벗은 마음으로 죽음 앞에 마주 서면서 성찰해 본 적이 있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반신불수가 되고 눈이 멀어, 치유하기 위해 50일 단식을 하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매일 유서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감옥에서 사형수 동에 있었는데 보통 5-10년에 한 번씩 집행하는데 하필 제가 있을 때 집행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위해 지극 정성으로 빨래하고, 반찬 만들고, 운동장에 있는 민들레를 캐서 비누 곽에 담아 주곤 하던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얼마 남지 않은 행복인데 그것마저 뺏지 마십시요’ 하면서 계속했습니다. 사형수들을 보면 그 사람이 언제 그런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을까 싶을 정도로 성인들입니다. 그 사람이 사형집행일에 저에게 와서 50발걸음만 동행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50걸음을 함께 걷는데,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 아쉬워서 몇 걸음 가다가는 멈춰서고, 또 멈춰서고 하면서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갈 수 없는 집행장 문턱에서 사형수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가 먼저 죽는 것은 억울하지 않은데, 자기가 몸받고 태어나 왜 그런 죄를 저질렀는지 그것이 참회스러울 뿐이고, 이제껏 살아오면서 왜 그리 화를 많이 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나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 하나하나를 잘 모시지 못했고, 나를 스쳐가는 하느님이나 천사들을 너무 몰랐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이었는데. 그래서 나는 자원해서 지옥에 가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은 민주화 운동인 것 같습니다. 다시 착한 몸을 받고 태어나면 절대로 화를 안 내되, 순수하고 의로운 분노만을 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여기서 거룩한 얘기를 하더라도, 문 밖에만 나가면 무한 경쟁에 머리채를 이끌려 다니게 됩니다. 사랑이냐 성공이냐 하는 문제인데, 성공이라는 세속 가치가 그렇게 무섭게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과연 진정한 성공이 뭔지, 제가 출소한 후 선물로 받은 시가 한 편 있는데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무엇이 성공인가> 하는 에머슨의 시입니다.

무엇이 성공인가

무엇이 성공인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서 칭찬을 듣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가려볼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최선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밭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내가 태어나기 이전보다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내가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더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우리가 이 겨울에 몹시 춥고 쓸쓸한 것은 IMF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큰 노조는 독일 금속연맹입니다. 노조원이 320만 명이고 상근자가 2천 명입니다. 이 금속연맹은 독일 민주주의의 보루와 같은 존재입니다. 보수파들이 집권하여 서민 대중에 불이익한 정책을 펼 때 여기서 총파업에 들어가면 꼼짝 못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 나라에서는 ‘전백련’(전국백수건달연합회)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큰 산별노조가 하나 떴습니다. IMF 때문에 애써 교육받고 사회에 나온 사람들이 실업자가 됩니다.

저는 우리가 IMF를 잘 묵상하면 좋은 진리의 빛이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첫째, IMF를 겪으면서 역사의 ‘시간차이’라는 게 참으로 냉혹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제나 바깥 세상의 변화 속도는 우리 내부의 개혁 속도보다 훨씬 빨랐고, 그 역사의 시간차만큼 혹독한 시련을 겪곤 합니다.
제가 감옥에서 IMF를 맞아 전세계 역사를 검색하면서 가장 유사한 사례를 뽑아 보려고 했더니, 가장 유사한 게 한말(韓末)입니다. 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썼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데, 깊이 공부를 해보니 대원군도 개혁을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습니다. 유교 기득권 사회, 양반 지주계급 사회의 근거지가 서원이었는데, 서원에 또아리를 튼 양반 토호 세력들이 조세개혁을 하거나 소작료 비율을 개혁하여 민중들을 위한 정책을 쓰려고 하면 강력한 반대를 했습니다. 지금의 재벌들보다 더한 수구 기득권 세력이었습니다. 이 세력을 부수기 위해서 서원을 철폐하려고 하니, 왕권을 흔드니까 상징적으로 광화문과 경복궁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개혁 개방을 하려고 당시 중국으로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세계 변화에 적응하려고 내부를 개혁하고 주체적으로 일어서기 위해 참으로 처절한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망했을까요? 역사의 시간차이 때문입니다. 세계열강은 우리 내부의 개혁 속도보다 빠르게 산업화를 해서 막강한 군비를 가지고 먹어 들어왔습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도 자기들 말로는 주체사상을 가지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개혁 개방으로 나가면 되는데 왜 가만 놔두지 않고 우릴 흔드느냐고 불만일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변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변화의 시간차이입니다. 그 변화를 앞당기기 위해서 깨어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운동이 필요하고 사회개혁이 필요합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화 속에서 인류가 한 가족인데, 자기들 변화의 시간만을 고집할 때 인민들을 다 굶겨 죽이게 됩니다. 항상 주체의 시간과 객관의 시간이, 세계의 시간과 우리 내부의 시간이 있습니다. 재벌도 마찬가집니다. 재벌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구조조정을 할 테니 가만히 놔두라고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국가는 망해버리고 경제는 죽어버리고 맙니다. 제 자신의 지난 시절의 치우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주의의 고귀한 휴머니즘과 진리는 가져가기 원하면서도 사회주의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느끼면서 연구를 하려고 몸부림을 했는데, 그렇게 연구를 하면서 개혁을 하도록 시간이 우리를 놓아두지 않습니다. 아마 그래서 급진 사회주의로 떨어진 오류를 남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둘째로 역사에서 현실은 건너뛸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박정희가 효율적인 경제성장을 한 공로는 있다고 말들을 합니다. 300년 서구의 산업화 시간을 30년 동안에 압축성장을 하여 30년 만에 경제는 졸부처럼 성장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신문화, 민주적인 가치, 사회복지, 인권, 영성 등 정말 중요한 삶의 가치는 압축해서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역사는 지불 청구서를 들고 완전히 가압류를 해버리는 것이 IMF 아닌가 합니다.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 건너뛸 수는 있습니다. 과거는 과거의 문제이니 덮어두고 미래로 나가자고 하지만, 미래라고 하는 것은 바로 과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과거가 쇠고리를 달고 있으면 과거청산 없이는 앞으로 달려나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단식을 40일쯤 했을 때,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니 어깨와 무릎에서 고름이 줄줄 흘러나왔습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여섯 살 때인가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 다친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세포가 그 기억을 지금까지 물려주다가 단식을 하니까 몸이 치유되면서 고름이 나온 것입니다. 사람의 몸도 지난 상처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데, 하물며 살아있는 사람의 가슴에 맺힌 상처야 어떠하겠습니까? 일제 때의 독립운동가들을 다 때려잡던 세력들이 그대로 있다가, 이승만이 정권을 잡으니까 반공만 내걸면 다 면죄부를 주고, 지난날 군사독재 때 온갖 억압과 착취를 하면서 나라를 전부 망쳐놓고도 그 죄를 건너뛴다고 해서 역사가 건너뛰어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바로 그런 지난 시대의 잘못된 가치관들, 친일, 군사독재의 과거가 한 번도 청산되지 않으면서 이런 IMF가 오게 된 것입니다.

셋째로는 신뢰라는 가치입니다. 대개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관계가 참 좋은 분들 같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라는 그물망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그물코입니다. 관계로 다 이렇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조상과 후손과 이웃들과 사회적으로 관계가 이루어진 속에서 신뢰가 꽃필 때, 그 사람은 성공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신뢰가 많이 가는지 생각해 보면

첫째, 정직 투명한 사람입니다. 사상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사업적으로나 투명하지 않은 사람을 저는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 성실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가진 실력 그 이상을 내걸고 말하는 사람을 우리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자기 실력을 길러가는 사람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셋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나라를 망쳐놓고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잘못을 하고 치우친 점이 있다면 처절하게 참회하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역사와 민중 앞에 무릎을 꿇는 그런 힘이 우리를 미래로 나가게 합니다.

넷째, 미래가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처럼 변화가 빠른 세상에서는 나날이 치열한 자기 학습을 하는 사람인가가 중요합니다. 자기 학습을 하지 않으면 금방 낡아져 버립니다. 아무리 명문대를 나왔어도 계속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금방 낡아져 버립니다. 그리고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습니다. 건강하고 나날이 학습하는 사람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뢰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관입니다. 저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이것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변해서는 안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적극적인 자기 변화와 창조를 이루어가는 사람, 아마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IMF가 오면서 고생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IMF가 오면서 우리 서민들이, “우리 민족이 또 고생이구나” 하는데, ‘고생’이라는 말에는 조상들의 심오한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괴로울 고(苦)에 태어날 생(生)입니다. 우리는 “고생하십니다,” “수고하십니다” 하는 인사를 합니다. 생각을 해보니 이 말은 “당신께서는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창조의 재료인 고통을 모시고 있군요” 하는 뜻입니다. 아이를 낳으면서 진통을 합니다. 부활을 하려면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고통 속에서 좋은 창조가 이루어지고 있군요” 하면서 축복을 빌어주는 말입니다. 뜻을 세운다면 고생도 수행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늘 고통 속에 현존하시는 것 같습니다. 역시 고통이 창조의 원천이고, 미래, 생명과 부활의 원천인 것 같습니다. 모든 고통에는 뜻이 있고, 메시지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IMF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사람들은 흔히 IMF가 YS 탓이라며 경제청문회에 세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IMF가 YS탓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YS는 중요한 개혁을 많이 했습니다. 30년 군부 쿠데타의 핵심인 하나회를 숙청했습니다. 그리고 5,6공 역사의 청산과 TK의 편중을 청산한 분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IMF의 이유 중에 YS가 외환관리를 잘못한 탓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박정희주의’라고 봅니다. 박정희주의는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경제성장 제일주의입니다. 오직 경제, 인사결정과정에 어떤 복잡성이라든가 민주성이라든가 약자를 우선한다든가, 분배한다든가 하는 복잡한 것은 다 치워버리고 모든 사회를 군대식으로 편제해가지고 효율적인 경제성장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민주주의, 사회복지, 인권, 자유, 정신문화는 다 돈이 안된다고 탄압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놓은 체제가 재벌체제입니다. 재벌은 전세계에서 그야말로 가장 비효율적이고 부도덕한 체제입니다. 대기업과 재벌은 다릅니다. 재벌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많은데, 시간이 없어 넘어가도록 하죠. 그래서 성장제일주의, 재벌체제, 이것이 지금 유죄로 남아있습니다. 그것이 70년대까지만 해도 굉장히 효율적인 체제로 가동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공로는 있습니다. 생존단계에서 생활단계로, 삶의 질 단계로 복잡해질 때부터는 질곡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지금까지 유지해오면서 나라의 개혁과 진정한 경제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거죠.

둘째로는 국가절대주의입니다. 70년대에 저는 공장에서 하루 12시간 일했고, 특근철야는 보통이었습니다. 수출선적 날짜 맞추느라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일주일 내내 일한 적도 있습니다. 잠을 못 자니 프레스가 덜컹덜컹하는데 손이 막 들어갑니다. 당시에 조장이나 반장들은 대나무에다가 긴 바늘을 꽂고 찔러주고 다니는 게 일이었습니다. 하루저녁에 손이 세 명씩 날라간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계는 돌아갑니다. 그런 속에서 경제를 이만큼 만들어나간 게 노동자입니다. 천만에 달하는 노동인구, 그 가족까지 2천5백에 달하는 국민의 절대다수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속에서 존재도 없이 천대받아가면서 그렇게 고통을 받는데 노동자 문제를 말하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제가 향린교회에 오게 되었던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일년에 한번 추석에 고향에 가는 것은 노동자의 꿈입니다. 추석을 앞두고 일주일 내내 저녁과 철야로 노동을 했는데도 석달째 임금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사장은 돈을 많이 벌어 챙기면서도 우리들에게는 임금을 주지 않았습니다. 고향에 갈 차비라도 달라고 했더니 안 주어서 버티며 데모를 하니 경찰들이 와서는 잔인하게 잡아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행동과 품행이 조신하고 여자 같다고 별명이 ‘공주’였습니다. 저는 그때 신부가 되려고 했기 때문에 항상 뒤로 빠져 있었는데, 여성노동자들이 너무도 처참하게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경찰들이 저더러 “네가 주동자지?” 하면서 처참하게 짓밟고 뚝방천에 갖다 버렸습니다. 그 밤중에 절뚝거리며 뚝방천을 기어나오면서, 내가 이 길을 계속 가면 나는 분명히 죽을 텐데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하면서 나도 평범하게 살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들이 뚝방천에 나를 버리면서 목을 짓밟고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고는 “임마, 니가 대학생이야 뭐야? 이 공돌이 자식아. 너는 여기서 죽여서 삼팔선에 갖다 버리고 북한 넘어가려고 했다고 하면 돼.”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박정희 정권 때라 그 말은 너무도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난 내가 죽더라도 뜻이라도 살아나면 원이 없겠는데, 이건 개죽음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려면 대학생 친구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대학교를 찾아다녔습니다. 인상 좋은 친구한테 “이야기 좀 합시다.”라고 하면 “무슨 과예요?”, “몇 학번이에요?” 하고 물어보니 얘기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향린교회에 가면 좋은 분들이 있다고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향린교회로 찾아오게 된 거고,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그때 따뜻하게 감싸주는 분들이 없었더라면 세상에 대해 절망을 하면서 적개심과 증오로 빠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요즘은 DJ Doc처럼 머리를 빡빡 밀면 사회에 불만있냐고 하지만, 그때는 장발하면 불만이 있냐고 했습니다. 경찰들이 요즘 음주운전 단속하듯이, 잣대를 가지고 다니면서 무릎 위 10cm 올라가면 구류를 시켰습니다. 국가가, 독재권력이 국민생활의 모든 구석구석, 심지어는 막걸리를 팔아라 말아라 하는 것까지 간섭하는 게 국가절대주의입니다. 그게 때로는 효율적일 때도 있었지만, 나라가 군사체제화되는 겁니다. 이래서 만들어지는 게 관료주의 절대주의입니다. 그래서 관료가 절대권한을 쥐고 있으니까 당연히 부정부패가 발생하는 겁니다. 무능한 관료들, 수구 기득권적인 관료들 때문에 이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로는 반공주의입니다. 절대주의, 안보상업주의, 반공주의가 결탁이 되어서 지금같은 IMF 사태가 온 것입니다. 세계는 보다 창조성이 있고 창의성이 있는 사고와 그런 경제발전 방식을 요구합니다. 사회주의적인 것도 있고, 자본주의적인 것도 있고 다양한 가치와 여러 가지가 공개적으로 경쟁을 하면서 창의성이 살아나고 해야 하는데, 나머지 한쪽을 다 잘라버린 겁니다.

IMF가 온 둘째 원인은 헤지펀드 자본주의입니다. 단기성 투기자본을 이야기하는데, 자본주의가 일반 경쟁을 하다가 중소기업이 생기고 거기서 큰 대기업이 생기고 독점체제가 생기고, 나라끼리는 큰 독점을 하는 나라들이 생기고 뭐 이러다가 세계화 경제가 되면서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로 나오는 게 헤지펀드 자본주의입니다. 그런데, 헤지펀드 자본주의는 실물경제의 무려 25배나 됩니다. 1조3천억 달러쯤 되는 거대한 자본양이 2-3초간에 왔다갔다 드나듭니다. 그래서 한 나라를 모라토리움 사태로 발생시킵니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첫째는 빈부격차입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강남 압구정동에 가면, ‘이대로족’이라고 있다 합니다. 금리가 쏟아지는 IMF여, 이대로만 가라고 맥주잔을 부딪치며 마실 때 “이대로!” 하면서 마신다고 합니다. LA에 가면 골프장의 80%에 한국인이라고 합니다. 빈부격차가 해소가 안 됩니다. 제3세계와 부자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는 실업입니다. 국제노동기구 발표에 의하면 21세기에 20%이상으로 세계의 실업이 생긴다고 합니다. 미국이 4.5%로 실업률이 제일 낮습니다. 미국경제 한 군데만 잘 돌아갑니다. 그런데, LA 타임즈와 AFP 지국장과 인터뷰를 하면서 물어봤더니, 미국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흑인 노동자와 남미계, 아시아계, 파트타임 노동자를 포함하지 않으니까 그런 수치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들까지 하면 10%가 넘습니다. 지식정보사회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도 실업률은 계속 늘어납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1백만, 2백만, 3백만 실업자를 안고 가야지, 실업자가 없는 과거와 같은 세상은 이제 다시 오지 않습니다. 실업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간문제로 저는 두 가지를 보는데, 실업문제, 일자리 문제와 생태위기문제라고 봅니다. 이 두가지가 지금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물질탐욕과 과소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근원 모순은 과잉생산 과잉축적입니다. 경쟁을 하려고 필요 이상으로 많이 생산을 하다 보니까 재고량이 쌓이고, 자본이 누적이 되어서 과잉축적이 되니까 경제가 삐그덕 거리는 것입니다. 이걸 쏟아내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전쟁입니다. 과잉생산 과잉축적분이 가장 집중된 군수 물자를 쏟아 부어야만 경제가 돌아갑니다.

둘째는 대공황이 일어나서 실직자나 노동자 폭동이 일어나서 소비를 돌리는 방법입니다.

셋째로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처럼 합리적인 개혁을 통해서 대중소득을 높여서 부의 분배를 이루어서 소비를 일어나게 하여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방식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자본주의는 물질탐욕과 과소비를 해야만이 경제가 성장을 합니다. 이걸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구는 하나뿐입니다.

그 다음은 무한경쟁입니다. 요즘 애들 유아원서부터 몹시 바쁩니다. ‘전백련’에 가입하지 않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이렇게 어려서부터 바빠야 합니다. 이것은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더욱 바빠질 뿐입니다. 자본주의는 무한경쟁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대공황입니다. 지금 한국경제만 살아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경제는 이어져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나라에서 모라토리움이 발생하면 집단 연쇄반응으로 우리 경제도 주저앉게 됩니다. 히틀러를 지금은 악인이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민중의 존경과 절대지지를 받은 사람입니다. 당시의 민중과 시대정신이 만들어놓은 상징이 히틀러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사회보다도 시민사회가 더 성숙하고 진보적이었던 독일사회에 갑자기 실직이 생기고, 노동자들의 불만과 폭동의 기운이 팽배하니까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부추기면서 침략주의로 경제성장을 도모했던 것입니다. 이건 경제 논리입니다. 이런 대공황의 위협이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성능도 좋고 속도도 좋은 페라리 자동차처럼 아주 세련되었지만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뭔가에 부딪쳐야만 정지하거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부딪치는 역할을 사회주의가 해주었는데 지금은 사회주의가 없어졌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무한경쟁으로 세계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가 대안인가? 저는 사회주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현실체제로서의 사회주의가 있는데 이것은 선진자본주의보다 낙후되었다고 하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입니다.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모순을 통찰하면서 인간다운 가치를 실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이념이 힘을 갖는 순간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립니다. 절대주의, 우월주의, 숙청주의로 치닿습니다. 사회주의의 핵심은 아무리 무슨 사회주의를 붙여도 계획경제, 사유재산을 폐지하는 국유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일당주의입니다. 다른 당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중앙집권제가 되니까 수령주의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 보장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상의 자유가 보장이 되어 자유경쟁을 하게 해야 합니다. 음습하게 지하로 스며들지 않고 공개적으로 논쟁을 하고 어느 것이 좋은지를 풍부하게 논쟁을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치로서의 사회주의입니다. 노동의 소중함이 인정되고, 노동하는 사람들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이 세상과 인간은 평등해야 합니다. 물질보다도 사람가치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힘없는 사람들이 실질적인 나라의 주인이 되는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사회복지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잘사는 나라입니다.

저는 이 가치로서의 사회주의는 우리 사회에 훨씬 더 많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사태가 왔고 이것을 일궈내는, 꽃피워내는 합리적인 진보가 지금이야말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진보적인 정보와 세계와 지식사회, 그리고 효율성을 저는 존중합니다. 그것이 이루어낸 인간의 진보를 우리가 고귀한 유산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다가 가치로서의 사회주의를 또하나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서 이 자본주의, 사회주의가 모두 놓치고 있는 생태문제와 여성해방문제,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영성주의 즉 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에 못살 때에는 물질이나 삶의 조건이 행복의 모든 걸 규정했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상태에서는 자기 신앙과 영성과 마음의 성격과 삶을 바라보는 가치관에 따라 행복의 척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성주의는 진보적인 요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네 가지를 아우르는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운동과 그런 삶을 창출해 내려고 모색중이고, 지난 7년 동안 감옥 속에서 침묵, 절필, 삭발을 하면서 처절하게 목숨을 걸고 정진해 왔습니다. 저는 사회주의도 아닌, 자본주의도 아닌, 새로운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가 30년 동안 ‘압축성장’을 해왔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압축성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0년 동안 방치되었던 사회복지를 이루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지속적인 실직 대열 때문에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노동자들이 지금 현장에 가면, 지난 시절에 이루었던 모든 사회복지나 성과를 다 빼앗기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를 거부하는 게 아닙니다. 정리해고를 당하는 순간, 노조원자격증을 뺏겨 버릴 뿐 아니라 교육보험, 의료보험, 학자금 지원, 주택 등을 다 잃게 됩니다. 실직자금도 받기 어렵습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용직 자리도 없습니다. 굶어죽어야 됩니다. 사회복지가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사회복지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될 때입니다. 그래서 저는 민노총과 함께 이것을 강력하게 촉구했고 노동부에 가서도 요구했습니다. 산별노조를 만들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도저히 없습니다. 여자들이 집중적으로 잘리는데, 출산휴가비가 비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산휴가비용을 사회복지 비용으로 전환해야 된다는 안을 우리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와 민주주의와 자유와 인권, 정신문화가치, 분단극복문제, 남북교류문제 등을 집중해서 이루어내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압축성숙이 필요할 때라는 것이 IMF의 중요한 메시지인 것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시장경제를 벗어나서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시장경제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시장경제 내에서 민주개혁에 최선을 다하는 것, 사회복지를 만들고,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육성하고, 민주주의, 자유와 인권 남북교류, 분단극복, 지식정보 사회로의 전환 등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고르게 부자인 꿈을 넘어서서 덜 쓰면서도 건강하고 아름다운 새로운 가치관의 생활방식이 생겨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고르게 부자인 삶, 모두가 풍요롭고 평등한 삶이 진보의 핵심이었습니다. 그게 진보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구는 하나뿐입니다. 그것도 지극히 작고 여린 푸르게 떨고 있는 별 하나입니다. 지구자원이 무한하지 않고 유한합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쓸 미래를 도둑질해다가 편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60억 인구 중에서 18억 인구가 기아,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류의 절반인 30억 인가 하루 두 끼도 못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사람은 다 자기 정량을 타고 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듯이 일용할 양식만 구하라고 했고, 조상님들이 옛날에 그 어렵던 시대에도 산 입에 거미줄 안 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굶주리고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그 사람의 정량을 갈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지구 형제 가족들의 정량으로 먹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노동자는 이미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7,80년대 전태일이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칠 때 온 세계가 울었습니다. 도덕적인 정당성 때문에. 하지만 지금 한국의 실직자가 아무리 못살아도 몸만 놀리면 한 달에 30만 원은 벌 수 있습니다. 그런데, 30만 원 가지고 60억 인류 모두가 먹고 쓰고 소비한다면 지구는 얼마 안 가서 끝장나고 맙니다. 옛날에 우리가 제국주의 이야기를 했지만 이제는 바로 우리가 제국주의입니다. 지구시대에 이러한 새로운 윤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60억 인류형제 모두에게 “나처럼 벌고 먹고 쓰고 소비한다면 이 지구가 금방 푸르러지고 이 세상이 아주 살기 좋은 세상이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구시대에 정말 새로운 신앙윤리, 인간윤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IMF가 던지는 메시지는 고르게 부자인 꿈을 넘어서서 덜 벌어서 덜 쓰면서도 더 건강하고 아름답고 내적으로 풍요로운 어떤 새로운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일대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IMF 고난을 이겨내는 가장 중요한 정신이 아마 나눔과 연대와 참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가난했지만 열등감을 별로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가난했습니다. 가난을 혼자서 가진다면 열등감으로 떨어지지만, 가난을 함께 나눠가진다면 따뜻한 우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슬픔도 혼자서 갖는다면 한이 맺히고 비애에 빠지지만 슬픔을 우리 모두가 나눠가진다면 맑은 자기정화가 됩니다. 고통도 혼자서 가진다면 상처가 되고 적개심이 되지만, 우리 모두가 나눠 갖는다면, 고통은 미래창조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눔의 가치가 필요합니다. 이 사회적인 고통분담을 거부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힘이 없기 때문에 서로 연대해야 합니다. 뭉치고 모이고, 서로가 평등하게 소통하다 보면, 거기서 힘이 나옵니다. 그래서 나눔과 연대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여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국민의 3대의무를 이야기해 왔습니다. 공동체 생명을 지키는 국방의 의무, 그리고 나라살림과 사회 인프라 전체를 위한 납세의 의무, 공동체 성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기본교육이 필요하다고 해서 교육의 의무, 이렇게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네 가지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정치자금과 권력이 한편이고 다른 쪽에 노동이 적대하고 있는 두 가지의 전선이었다면, 지금은 세 가지, 삼대권력이 있습니다. 시장권력과 정치권력과 시민사회권력이 세 솥발처럼 서야지만이 밥이 잘 익어갑니다. 지금이야말로 시민운동에 대한 참여의무가 추가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 월급의 단돈 5천 원이라도 매달 시민단체에 헌금하고 내 시간에 한달 2시간이라도 캠페인하는 데 같이 나가주고, 시민운동의 자기 분야에서 참여해 주는 것이 나라살림과 기득권 세력의 횡포를 견제하고 감시하고 올바르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사랑의 신앙을 사회로 확장 해나가는 핵심적인 의무가 참여인 것 같습니다. 지금 긴급한 사회참여가 몇 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동부에서 민노총에서 주장하면서 실직 폭동이 우리 공동체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여러가지 개혁법안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도움이 필요하고,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육성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조선일보를 이번에 정리해 내고 반성시키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지금 조선일보가 왜 이념논쟁을 거는지 잘 지켜봐야 합니다. 조선일보가 이념논쟁을 붙여서 국민여론을 갈라놓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재벌들이 4월까지만 버티자며 버티고 있습니다. 기득권 집단의 네트워크 속에서 나온 전략적인 행동입니다. 1월부터 자민련에서 내각제 추진위가 띄워집니다. 그렇게 되면 한나라당과 TK와 자민련이 연합하여 내각제로 통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재벌들도 그들과 함께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념논쟁으로 갈라놓게 되면 김대중 정부나 민주 진보세력들을 소수로 고립시켜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전략 때문에 이념논쟁으로 한쪽에서는 흔들고 다른 쪽에서는 내각제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재벌들은 4월까지만 버티면 개혁은 물거품이 됩니다. 지금 내각제나 조선일보의 문제는 단순하게 언론의 횡포문제나 정치체제와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가 달린 개혁이냐 반개혁이냐의 문제입니다. 저도 바로 들어가게 됩니다. 외신 지국장들을 만나서 견해를 들어보니 내각제가 되면 외자가 다 빠져 나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30년 민주화운동의 정통성을 가진 세력들이 정권을 쥐고 있으니까 그나마 신뢰를 하고 한국에 투자를 하는 것인데 재벌들이 저렇게 개혁을 안 하려고 하는데, 무슨 미래가 있겠느냐며 다 빠져나갈 것이랍니다. 두번째로 그나마 민주세력이니까 하고 참고 있던 노동자 폭동이 일어납니다. 남북교류도 끊길 것입니다. 북한의 김정일 집단의 수구강경 세력과 남쪽의 기득세력이 적대적인 의존관계 속에서 긴장을 서로 고조시키고 남쪽에서는 반공주의를 일삼으면서 개혁을 차단시킵니다. 민주세력은 다시 탄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민주 세력들이 거리로 뛰쳐 나오는 상황이 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계가 ‘그래, 한국이 진통을 겪으면서 준비될 때까지 멈춰줄게’ 하면 좋겠지만 세계는 우리를 위해 멈춰주지 않습니다. 역사와의 시간 차이가 또 벌어지고 그만큼 더 혹독한 순간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정치적 견해를 떠나서 우리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고,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우리가 지혜롭게 행동을 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몹시 어려울 때 맞는 대림절의 의미가 새로운 것 같습니다. 역시 하느님은 고통 속에 있고, 고통 속에서만이 부활이 있고 기다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겨울이 지나가도록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봄은 겨울의 한 중심에서 씨앗처럼 자라나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치열한 것입니다. 기다림은 좋은 세상이 멀리서 오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이미 와 있는 좋은 세상의 싹들을 품어 기르면서 나날이 새롭게 좋은 세상을 닮아가도록 자기를 쇄신하는 처절한 개혁의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꿈을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라 살림도 어렵고 경제도 어렵고, 취직도 어렵고 하다보니 자꾸 꿈이 타협이 되는데, 우리가 꿈을 잃지 말자는 생각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70년대에 제가 가졌던 꿈이 있습니다. 노동조합 한번 만들어 보는 것과 하도 한이 맺혀서 머리 좀 길러 보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야 너는 왜 꿈 같은 얘기만 하냐? 한국사회에 그런 날은 안와" 했습니다. 그랬는데 우리 모두가 노력을 하다 보니까 현실이 되었습니다. 80년대에는 직선제로 대통령 한번 뽑아 보는 것, 민주 노총과 진보정당 만들어 보는 것, 마음놓고 세계 좀 돌아다녀 보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더러 그런 꿈 꾸지도 말라고 했었는데, 그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저는 21세기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기다림을 가지고 새로운 꿈을 꿉니다. 그것은 우리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자전거나 자동차를 타고 그대로 평양으로, 신의주를 통해서 만주벌판과 시베리아 벌판과 유라시아 초원을 지나서 파리까지 가닿는 꿈입니다. 그리고 다시 횡단열차를 타고 서울에 와서 저녁식사를 함께 나누는 꿈입니다. 우리는 분단 때문에 좁은 데 갖혀 있어 상상력과 감성이 다 마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오천년 농경전통을 가졌을 뿐 아니라 유목 민족이었습니다. 여성들이 말타던 사람들이었기에 기가 셌습니다. 이런 여성들을 분단된 나라에서 남자들이 꽉 짓밟고 있으니까 화병이 생깁니다. 우리는 분단 때문에 상상력이 막혀 대한민국의 모든 고향 노래는 남쪽이 고향입니다. 분단이 우리의 사고를 모두 다 갈라 놓았습니다. 분단으로 막혀 오천만이 반쪽 땅에서 바글거리며 살려니까, 좁아서 기를 못펴니 기가 안에서 터져 찢어집니다. 그래서 동서 지역감정이 생기고, 여성과 남성이 생기고, 계급차이가 생기고 그래서 우리 나라에는 이분주의밖에 없습니다. 극좌냐 극우냐,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할 뿐입니다.

창조적인 변화는 모두 변절이라고 여기니까 사람들이 그런 것에 위축이 되어 창조적인 시도를 못합니다. 이만큼 고생을 하고 고통을 당한 민족이면 세계에 내놓을 큰 사상과 정신이 나와야 되는데, 30년 50년 민주화 운동을 해도 큰 정신 하나 나오지 않습니다. 분단 문제는 삶의 공간 문제입니다. 우리가 기차를 타고 그대로 나가면 내일 아침이면 끝도 없이 눈내리는, 하얗게 눈 쌓인 자작나무 숲을 보게 될 것입니다. 3일이 계속되는 자작나무 숲을 보면서 아 세상이 광대하구나, 정말 내가 좁았구나, 너그럽게 살아야지, 내가 너무 작았어, 세상이 이리 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커, 하면서 자아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연변으로 해서 유라시아를 거쳐 파리까지 가다보면 여러 문명권을 만나게 됩니다. 다양한 문화와 민속을 접하면서 우리가 다양성과 차이와 다름을 존중하면서 그런 것들 속에서 새로운 창조, 폭넓은 사유의 방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IMF가 되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베낭여행이 끊긴 것입니다. 이 좁은 땅에서, 바다에 막혀서, 분단에 막혀서 대륙도 못 가보는데 베낭여행이라도 가서 세계를 돌고 나면 달라집니다. 저는 발이 큰 사람을 존경합니다. 카페트만 밟은 사람은 카페트적 생각만 하고 현장만 밟은 사람은 현장적 사고밖에 못합니다. 발이 넓으면 더 넓은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지구시대, 정보화 시대의 진보성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정보를 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한 같은 경우에 아무리 김일성 수령님하고 주체성을 갖는다 해도 그것은 닫힌 주체성입니다. 열린 주체성으로 세상에 있는 정보를 인민 개개인이 주체가 되어서 세상에 객관적으로 있는 다양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스스로 판단할 때 그게 진정한 주체성입니다. 열려 있어야 됩니다. 하느님은 무한 기간으로 열려있는 분입니다. 분단에 대해 비록 저 정권이 밉더라도 남북교류를 거쳐, 북한주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품는 것, 다양성을 품고 민족 공동체 성원으로서 이 공간을 넓혀나가는 것, 그래서 21세기에는 우리 아이들에게 통일된 나라, 분단이 극복된 나라를 물려주지 못하면 죽어서도 할 말이 없는 존재가 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또 한 가지 꿈은 고르게 부자인 삶을 넘어서서 덜 벌어서 덜 쓰면서 더 건강하고 더 아름답고 더 축복된 삶을 살아보자고 노동자와 여성과 서민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모든 분들이 총파업과 시위에 나서서 인류의 양심을 흔들며 강대국들을 반성시키는 아름다운 시위를 하는 꿈입니다.


꿈을 저 혼자 꾼다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 모두가 나눠 가지면 반드시 현실이 된다고 확신합니다. 이 꿈을 입이나 머리로만 꾼다면 꿈에 지나지 않겠지만 자기 몫의 고통을 나눠 가지면서 생활 속에서 하나하나 실천해 나간다면 그 꿈은 현실이 된다고 확신합니다. 나아가 이 꿈을 젊을 때 한때 꾼다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생을 두고 끝까지 꾸어 나간다면 반드시 현실이 되리라는 것을 믿으며, 마지막으로 우리가 아주 힘들고 지칠 때 함께 나누었으면 하는 시 한편으로 마치겠습니다.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길을 잃어 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하는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너의 하늘의 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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