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한국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최대의 위기에 처해있다. 이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라는 민주화운동 출신 정부들이 추진한 신자유주의정책에 의해 사회적 양극화가 사상 유례 없는 수준으로 악화되어 다수 서민들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민주화냐'며 박정희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들 정권들이 지난 십년간 도덕적으로 타락한데다가 독선과 오만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지난 2007년 6월, 6월 항쟁 20주년 국제회의에서 개인적으로 한 논문을 통해 지적한 내용이다. 그리고 그 같은 위기는 예상한대로 2007년 12월 대선에서 민주화운동 진영의 참패로 나타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같은 민주화운동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얼굴, 그리워지는 얼굴이 있다. 바로 제정구 의원이다.
 
  물론 그가 10년 전 갑작스럽게 병으로 유명을 달리 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고 민주화 운동이 위기에 빠지지 않았을 것은 아니다. 또 대선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 그는 민주화 운동을 위기로 몰고 간 민주화 운동 출신 정치인들, 나아가 운동가들과는 다른 정치인이자 운동가였다. 중요한 것은 그가 민주화운동을 위기로 몰고 간 오만, 독선, 도덕적 타락 같은 것들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지닌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가 살아있었다면 민주화운동 진영이 이처럼 망가지는 것에 어느 정도 제동을 걸어줄 수는 있었을 것이다. 아니 지난 일들이 문제가 아니다. 이제 민주화운동이 다시 일어나 국민들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서는 제정구 의원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우리가 폐허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 배워야 할 사표(師表)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발문을 쓰는 이유이다.

  
  그는 그의 일생의 동반자였던 푸른 눈의 정일우 신부님이 자신을 "껍데기는 딱딱하지만 속은 부드러운 사람"라고 평했다고 전하면서 자신들의 동거를 "겉보기는 부드럽지만 속이 강한 사람과,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부드러운 사람"의 동거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제 선배는 "껍데기는 딱딱하지만 속은 부드러운 사람"이 결코 아니다. 정반대로 정 신부와 마찬가지로 "겉은 부드럽지만 속이 강한",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인물이다.
 
  사실 그는 말이 많거나 말을 화려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정치인으로서 제정구는 노무현, 유시민 같은 스타 정치인은 아니었다. 그는 백을 알면 열만 이야기하고 백을 실천하면서도 말로는 열만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난 두 정권, 나아가 민주화 진영은 말만 앞세워왔다. 그 전형이 같은 통추 회원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은 한마디로 형식의 급진주의이다. 즉 내용은 사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이라크 파병 등이 보여주듯이 매우 보수적이거나 그리 진보적이지 않지만 말과 행동이 급진적이라 분란을 일으켜 왔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빈 수레가 요란했다". 반면에 제 선배는 말은 부드러워도 내용이 급진적인 사람이었다. 구체적으로, 말과 행동은 부드럽게 했지만 삶은 누구보다도 급진적으로 산 사람이었다. 가짐 없는 큰 자유, 그것처럼 급진적인 삶이 어디 있는가? 운동권들이 목청만 높여서 민중을 이야기할 때 그는 조용히 민중과 함께 생활하면서 스스로 가난을 실천했다. "깊은 강은 조용히 흐른다"고나 할까? 민주화 운동이 배워야 할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민주화 운동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제 선배와 같은 외유내강, 겸허함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노무현식의 스타일의 급진주의만이 아니라 운동권의 관념적 급진주의역시 반성해야 한다.
 
  어찌 보면 외유내강과 모순된다고 볼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외유내강 때문에 가능하다고 볼 수 있지만, 용기이다. 특히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는 과단성과 용기이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지만 한번 결정하면 무섭게 밀어붙이는 용기의 소유자였다. 그 작은 기득권에 얽매여 쉽게 원칙을 버리는 386세대 정치인 등 많은 민주화 운동 출신의 정치인들과 달랐다. 70년대 중반 결혼을 해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는데 취직도 힘들고 먹고 살기가 어려워 고민을 하다가 취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로 결심하고 남은 돈 3천 원을 다 털어 성서를 샀다고 한다. 그리고 성서에 "축 취직 기념(하나님께)"이라고 썼다는 일화에서 그의 결단력과 용기를 읽을 수 있다. 그러하기에 95년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을 분열시키고 정계에 복귀하자 대부분의 의원들이 그를 따라 갔지만 그는 "대의를 위해 죽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의미 없는 재선, 삼선의원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초선의원으로 장렬하게 전사하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그의 용기를 가능케 한 것이지만 청빈함, 나아가 자기 비움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가난을 넘어 가난에로"를 선택해 '가짐 없는 큰 자유'를 향해, '가짐 없는 큰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아내가 운동화 뒷축을 구겨 신고 다니자 운동화가 빨리 닳는다고 야단을 치고 물 마실 컵을 사오자 "바가지로 먹으면 되지 무슨 컵이 필요하냐"고 쓰레기통에 던져 버릴 정도로 그는 가난을 실천했다. 인간은 "다 버렸을 때가 자유고 해탈이며… 사람은 버리기 위해 태어났고 버리기 위해 산다"는 그의 철학이 있었기에 그는 국회의원이 돼서도, 특히 노른자위라는 건설위에 속해 있으면서도, 깨끗한 정치를 실천하며 변함없는 삶을 살 수 있었다. 반면에 적지 않은 386세대들은 청와대 입성 후 몇 달 만에 고급 호텔에서 놀더라는 비아냥거림을 관료들로부터 받고 있다. 하다못해 민주노총 지도부까지 부패 스캔들로 감옥을 가야 했다. 이 역시 우리가 그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는 물질적 유혹만이 아니라 권력과 명예심과 같은 모든 욕심을 비워 "욕심에서부터 자유"를 얻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끝없는 자기성찰도 우리가 배워야 하는 제 선배의 장점이다. 오만의 극치였던 노무현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화운동 진영은 대부분 그동안 자기성찰이 없이 오만해 있었다. 항상 적과 싸우는 것이 중요했고 이는 자신과의 싸움을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성찰이 없는 운동과 조직은 썩기 마련이다.
 
  제 선배가 94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한 특파원이 "재야에서 국회의원이 된 뒤 무엇하고 투쟁하느냐"는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제 의원은 "나 자신과 투쟁합니다"고 답했다고 한다. "독재와 싸우다 보니 나 자신도 나도 모르게 독재화되어 있었다…내 속의 그 독재와 그 권위주의를 보고, 그 야심들을 감시하고 찾아내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실세들, 나아가 민주화 운동 진영의 지도자들이 이 같은 자기성찰을 계속해 왔다면 지금과 같은 위기를 자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이 같은 자기성찰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극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94년 서울의 한 부유한 가정의 부부가 처참하게 살해됐다. 조사결과 그 범인은 박한상이라는 대학생으로 돈 때문에 부모를 살해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모든 언론이 희대의 패륜아라고 범인을 욕하고 있을 때 제 선배는 돌연 단식에 들어갔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의 돌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동학혁명 이후 우리사회가 수단방법을 거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면 모든 불의가 정당화되어 온 한국현대가 나은 비극"이자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시대적 징표"인데 기성세대와 지도급 인사들은 그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며 자성의 뜻으로 단식에 들어간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지금까지 했던 "투쟁하는 단식"이 아니라 "반성하는 단식"을 한 것이다. 정치인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이 땅의 수많은 종교인 중 그 누구도 이사건과 관련해 참회의 단식에 들어가지 않을 때 그는 혼자 반성하는 단식에 들어간 것이다. 이 같은 그의 행동에서 나는 정치인을 넘어서 구도자 제정구, 종교인 제정구의 모습을 본다.
 
  우리가 제 선배에게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민중을, 국민을 대상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하고자 했다. 김대중 정부가 '국민의 정부'를 이야기했지만 국민의 정부에 국민은 없었고 '참여정부'가 참여를 이야기하지만 국민 참여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특히 노무현 정부의 경우 "대통령은 21세기인데 국민은 아직도 19세기"라느니 하며 자신들에 비판적인 여론에 대해 오히려 국민들을 탓하고 국민들을 훈계하고 가르치려 했다. 사회운동 역시 민중을 이야기하지만 많은 경우 민중은 어느 순간엔가 대상화되어 버린 지 오래이다.
 
  그는 이미 70년대에 민주화운동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을 민중들 속에 존재하는 "무질서 속의 질서를 모르고" 이들을 잡초로 간주해 품종 개량시키려고 드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은 구구절절이 민주화운동 세력이 모두 한번 새겨들어야 하는 절창이다. "함께 산다는 것은 선하고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그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며 또한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삶과 생명을 같이 나누면서 섞여 사는 것을 뜻한다. 같이 의논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에 짐이 되면서 사는 삶이다…일반적으로 부자일수록,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권력이 높을수록 간섭받기를 싫어하고 이해관계가 없는 한 간섭하기도 싫어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간섭함으로써 살아간다…같이 산다는 것은 잡초의 품종을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잡초임을 배우고 깨달아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는 것이다." 제 선배를 생각하며 운동권에 팽배한 먹물 특유의 관념적 급진주의를 한번쯤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 같은 그의 생각과 밀접히 관련이 있는 것으로 그에게서 주목해야 하는 것, 배워야 하는 것은 연대의식과 공동체정신이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신자유주의정책을 추구한 결과 우리 사회가 과연 한국사회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공동체가 무너지고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의 장으로 변해 버렸다. 특히 이 점에서 그가 강조하는 연대의식과 공동체정신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운동의 경우도 연대의식과 공동체정신이 진보와 좌파의 진정한 핵심가치임에도 불구하고 교조화된 이념만 남고 이 같은 정신은 형해화되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문제의식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운동의 경우도 민주노총이 노동자계급 중에서는 그나마 상류층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직노동자들의 이익을 주로 대변할 뿐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열악한 조건에서 고전분투하고 있는 비정규직에 대한 연대의식은 아직 취약하다.
 
  반면에 제 선배는 민주화 직후인 89년에 이미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의와 연대의식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므로 연대의식이 없는 정의란 전두환 정권처럼 가장 추악한 불의와 폭력이 되고 만다". 이 얼마나 무서운 경고인가?
 
  공동체에 대한 그의 깊은 애착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3년 뒤 IMF 경제위기와 함께 우리사회가 양극화되어 그나마 남아있던 공동체마저 사라져 버릴 것을 예측이라도 한 듯 1994년에 "우리 시대를 이끌어 갈 핵심적인 시대정신은 공동체 정신"이며 "한국정치 개혁의 핵심적인 방향도 함께 사는 공동체 정치문화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 같은 생각에서 그는 아파트의 경우도 아파트 주민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마을 공동체를 제고시키는 방향에서 주택정책을 만들어 가도록 촉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의 공동체의식은 그의 독특한 가톨릭관 내지 성경해석에서도 읽을 수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제 선배를 처음 만났을 당시 그가 기독교나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기에 미국 유학 시절 그가 천주교 계통에서 빈민운동을 하다가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운동을 위해 천주교에 '위장취업'했을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발문을 쓰기 위해 그의 글과 여러 자료를 보면서 이 같은 나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정일우 신부가 왜 그를 근본적으로 "종교인, 아니 구도자"라고 이야기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독특한 그의 성경해석이다. 그는 창세기 3장의 에덴동산의 금단의 사과 이야기를 공동체라는 문제의식에 해석하고 있다. 그는 "따 먹지 말라고 하는 나무가 어디 있었느냐 하는 게 중요한데 성서에 보면 그 열매가 에덴이라는 동산 한 가운데에 있었다는 겁니다. '한가운데' 있다는 하는 그 '한가운데'의 의미가 무엇이냐? 그 의미는 전부가 공동으로 사용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이 명령을 했든 안했든 상관없이 그것은 공동체에 속해 있는, 어느 개체가 독점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물건이었어요. 소유할 수 없는 물건을 소유했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에덴동산 이야기도 공동체라는 문제의식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회운동가들과 달리 그는 영적인 면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사회와 공동체 못지않게 '개인'과 '인간' 그 자체도 중요하다. 사회문제가 해결되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고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는 운동권의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제 선배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은 "'홀로'와 '함께'라는 두 가지 조건과 한계를 가진 존재"이다.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가? 인간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라는 맑스의 정의를 읽고 무릎을 친 후에 몇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한 번 무릎을 치게 하는 인간에 대한 멋진 정의이다.
 
  공동체의식이 극한으로 갈 때 다다르는 필연은 바로 제 선배와 같은 생명사상이다. 모든 생명이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이면 모두 생태주의와 생명사상을 이야기하지만 제 선배는 이미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생명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니 김지하의 회상에 따르면 훨씬 전부터 이 같은 생각을 갖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김지하 선생이 감옥에서 나온 뒤 한 모임에서 생명운동을 이야기하자 한 목사가 전통적인 운동논리로 자신을 공격했다고 한다. 그러자 제 선배가 "이 병들고 썩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자본론>같은 어려운 이론이 필요 없고 생명이라는 말 한마디면 족하다. 그 말 한마디에서 모든 심오한 사상과 확신이 우러나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회과학 공부가 아니라 더 높은 상상력과 더 깊은 성실성"이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그렇다.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 무엇보다도 반생명적이라는 것이다. 제 선배는 1989년 쓴 글에서 이처럼 전통적인 좌파의 인식을 넘어서 생태근본주의적 시각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그 속성상 물질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낭비하다 보니 한편으로는 쓰레기와 페기물이 누적된다…자본주의는 본질상 '함께 살기'가 아니라 '따로 살기'요 '너도 살고 나도 살고'가 아니라 '너 죽고 나 살자'며 물질을 경멸하면서도 물질에 철저하게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90년에 말하고 있다. "'나'라는 개체가 없는 공동체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생명체로서의 나 또한 공동체 속에서만 생명이 가능하다…생명에는 '홀로'라는 것이 없다. 언제나 '함께'이다. 바로 이 '함께'와 '같이'라는 생명의 본질에서 공동체가 연유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인식에 기초해 그는 90년대 초부터 "이제는 '물질의 눈', '물리적 힘의 눈', '따로 살기, 끼리끼리 살기의 눈'에서 돌아와 '사람의 눈', '생명의 눈', '함께 살기의 눈', '가난의 눈'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것이다.
 
  나아가 제 선배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회과학 지식이 아닌지 모른다. 한국 민주주의와 민주화운동이 현재 처해있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높은 상상력과 더 깊은 성실성"이다.
 
  어쨌든 공동체정신과 생명사상은 그로 하여금 1)노동자들의 경영참여 2)독점적 시장지배의 종식 3)장기적 차원에서 기간산업의 국유화와 공적 자본 확대, 나아가 자본의 기능적 사회화 4)토지 공개념에 기초한 택지의 국유화와 주거문제 해결이라는 급진적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소련 동구 몰락과 함께 찾아온 한국사회의 보수화 속에서도 제 선배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건설위에서 진보적 주택정책을 고수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87년 민주화 이후 지금까지 이루어진 경제정책 중 가장 진보적인 정책이라고 볼 수 있는 노태우 정권의 토지공개념 정책에 대해 국회건설위 소속의원 중 민주야당이라는 YS의 통일민주당과 DJ의 평화민주당 의원들이 오히려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빨갱이법이라고 결사반대를 했다. 대부분 건설업자들이거나 부동산 갑부들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여론 등에 힘입어 우여곡절 끝에 이 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이 법에 대해 위헌판결이 내리고 말았다. 이에 대해 제 의원은 "정당성 없는 사유재산권의 무절제한 행사는 필연적으로 모두가 함께 망하는 길로 귀착"된다고 헌법재판소를 비판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낮아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는 부동산 보유세를 높여서 현실화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현지거주민들은 대부분 쫓겨나고 외부 투기꾼과 중산층들의 재산증식 수단이 되고 만 재개발 사업을 공익성과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공공임대주택 정책의 후퇴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서는 등 자신이 속한 건설위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해 나갔다.
 
  마지막으로 정치가로서의 제정구에 대해 간단히 평가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제 선배는 모두들 만류하는 정치참여에 대해 걸레론을 펴며 정치의 길에 뛰어 들었다. "자신은 너덜너덜 떨어지고 더러워지면서 주변청소를 하는 걸레"가 되겠다던 그의 정치참여는 얼마나 성공한 것인가? 맞다. 그의 주장대로 정치는 '공기'같은 것이어서 더럽다고 안 들어 마시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누군가 자신의 몸을 더럽혀서라도 청소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정치를 걸레질 하느라고 들이마신 더러운 공기들은 결국 그를 갈아먹었고 그의 목숨을 뺏어가고 말았다. 다시 말해, 한창 일한 나이에 유명을 달리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정치실험을 본격적으로 펴나갈 시간이 없었다. 따라서 그의 실험의 성공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그러나 이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집어볼 대목들은 있다.
 
  위에서 소개한 건설위 의원으로서 건설정책에 끼친 영향을 일단 논외로 하고 제 선배의 정치실험의 핵심코드는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정치부패를 청산하는 깨끗한 정치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역주의와 사당정치로 상징되는 3김정치의 청산이다. 물론 군사독재 청산과 민주화도 또 다른 코드겠지만 이는 민주화운동 출신의 전체적인 과제로서 제 선배 특유의 코드라고 보기는 어렵다.
 
  제 선배는 1992년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어 14대 국회에 진출한 뒤 11명의 동료초선의원들의 깨끗한 정치선언을 주도했다(<14대 개원국회 열리는 첫 날>, 238쪽). 그리고 이를 실천했다. 특히 복마전이라는 평을 받는 건설위에 속해 있으면서도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끝까지 지킬 수 있었다. 이 점에서 그는 한국에서 깨끗한 정치가 가능하다는 모범을 보여줬고 이 점에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정치판 전체를 정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 같은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두 번째는 3김정치의 청산문제이다. 제 선배는 87년 6월 항쟁에 의해 얻어낸 직선제 성과를 양김이 분열함으로써 군사정권에게 상납하는 것을 보고, 그리고 이들의 권력욕에 따라 나라가 지역으로 나눠지는 것을 보고 보수야당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1988년 한겨레민주당을 만들어 출마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재야민주세력이 독자적인 정치주체를 꾸려 그 힘으로 양김 씨를 정치일선에서 후퇴시키고 야권청소와 야권통합을 주도하여 군사정권과 정면대결의 틀을 올바르게 갖추어야"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이념적으로 선명한 이념정당 노선보다는 '선 반제반파쇼, 후 진보정당 건설'의 노선으로 민중을 중심으로 한 반제반파쇼 정당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제 선배는 결국 이 같은 입장에서 한겨레민주당후보로 종로에서 출마하지만 패배하고 만다.
 
  이 후 제 선배는 3당 통합에 맞서 김대중 대통령과 평민당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통합야당에 합류해 민주당 의원으로 14대 국회에 진출했다. 이는 당초 내걸었던 3김 퇴진이라는 정치노선에서 상당히 후퇴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제 선배는 통합야당이 출범하게 되어 자신이 주장해온 대의와 맞는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양김 퇴진론에서 후퇴해 김대중 진영에 합류한 것은 한겨레민주당의 실험을 통해 독자세력화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즉 이 같은 실험이 "주관적으로 자의적인 판단만 앞세우고 국민들에게 대안세력으로서 어떠한 믿음도 심어주지 못"했다는 자성도 민주당 합류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주목할 것은 1992년 총선에서 진보정당인 민중당이 생겨났지만 그는 이에 합류하지 않고 보수야당인 민주당에 남아있었다는 점이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앞에서 지적한 그의 관념적 급진성에 대한 혐오감과 독특한 민중론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민중을 잡초로 생각하고 품종 개량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잡초임을 깨닫고 그들과 같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민중당식의 관념적 급진정당은 민중을 품종개량 대상으로 간주하는 '먹물정당'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 선배는 1995년 DJ가 다시 야당을 분열시키며 정계에 복귀하자 이에 대항해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이에 대해 그는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이 보스정치와 줄서기라는 전근대적 정치행태를 재현시키고 지역주의를 심화시키며 민주세력과 야권을 분열시키고 정당정치의 민주화를 후퇴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3김 청산의 깃발을 쳐든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등 당시 함께 했던 대부분의 개혁적인 소장의원들이 3김의 지역주의 바람으로 인해 1996년 15대 총선에서 줄줄이 낙마를 한 가운데 재선에 성공한다.
 
  이후 1997년 대선에서 그는 그의 생애 가장 논쟁적일 수 있는 선택을 하게 된다. 3김 정치에 맞서 개혁적 소장정치인들이 모인 통추는 97년 대선을 놓고 갈라지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 등 일부는 정권교체가 가장 중요한 과제라며 DJ캠프로 합류했다. 또 다른 일부는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제 선배, 이부영 전 의원 등은 정권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지역주의와 3김정치를 청산하는 것이 더 급한 과제라고 판단해 이회창 캠프에 합류했다. 이에 대해 그는 3김정치도 정치지만 DJ의 유신세력인 김종필과의 연대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즉 유권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DJP의 승리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당선될 가능성이 아무리 높아도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을 밀수는 없다. 낙선하더라도 되어야 할 사람을 밀고 그 선택에 대한 심판을 2000년 총선에서 달게 받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제 선배는 병을 얻어 유명을 달리 함으로써 자신의 선택이 올바른 선택이 되도록 이회창 진영을 이끌어갈 기회를 갖지 못했다. 또 자신의 선택에 대해 총선에서 심판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대선전까지는 그런대로 개혁적이었던 이회창 후보가 이후 보수화되고 새로운 3김 정치화된 것을 놓고 결과론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그의 선택은 틀렸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현재의 결과에 기초해 당시의 선택을 평가하는 결과론적 해석이며 97년 대선 당시만 해도 이회창은 소신 있는 대법관 출신의 개혁적 정치인이자 3김정치 청산의 기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 그가 비판했던 DJP연합에 의해 집권한 김대중 정부, 그리고 그에 이어 출범한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앞에서 지적한 신자유주의정책과 도덕적 타락, 독선, 오만으로 민주화 운동이 최대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선택이 이해가 되는 면이 많다. 그러나 이 모두를 떠나서 3김정치 청산을 꾸준히 주장해온 그로서는 97년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승률은 낮지만 옳은 길이라 그 길을 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은 지역주의의 벽 등을 고려할 때 오히려 승률이 높았다. 다만 대선 직전에 IMF 위기가 터져 나오면서 집권세력의 책임론으로 간발의 차이로 DJ가 승리를 했다. 다시 말해, 그가 바랬던 3김정치 청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제 선배는 3김정치 청산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역설적이라면 역설적으로 그가 그처럼 싸워온 3김정치 청산, 구체적으로 사당정치 청산은 97년 제 선배와 달리 DJ 진영으로 돌아간, 따라서 3김정치에 투항한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 3김정치에 일시적으로 투항한 노 대통령이 이후 경선과 본선에서 승리한 뒤 스스로 당정분리 등을 통해 사당정치를 스스로 청산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제 선배와 같은 원칙 있는 정치인들이 "초선의원으로 장렬하게 전사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벌렸던 3김정치 청산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제선배가 극복하고자 몸부림쳤던 3김정치 중 사당정치는 상당히 극복이 됐지만 또 다른 한 축인 지역주의는 별로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모두를 떠나서 앞에서 지적했듯이 한국 민주주의와 민주화운동의 위기의 시대에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많은 덕목들을 생각할 때 그의 부재가 너무도 아프게 다가온다. 다만 이번에 묶어서 내는 그의 육성이 실린 글들이 그의 부재를 대신해 우리에게 그가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좋은 지침이 될 것으로 믿는다. 특히 그가 지적한 '물질의 눈', '물리적 힘의 눈', '따로 살기, 끼리끼리 살기의 눈'을 넘어선 '사람의 눈', '생명의 눈', '함께 살기의 눈', '가난의 눈', 그리고 단순히 더 많은 사회과학 공부를 넘어서 '더 높은 상상력'과 '더 깊은 성실성'이 위기를 헤쳐 나갈 지침이 될 것이다.
 
  제정구 선배를 생각하면 떠오른 것이 하나있다. 그 특유의 웃음이다.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하회탈의 깊은 주름이 연상될 정도로 눈꼬리와 입주위에 깊은 주름이 생기게 파안대소하는 특유의 웃음,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 같은 웃음을 웃는 사람은 다시는 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혼이 실린 웃음이라고 할까, 아니면 혼마저 놓아버린 웃음이라고나 할까. 그 어느 경우든 삶의 고단함을 다 겪고 알면서도 간직한 맑은 영혼만이 웃을 수 있는 그런 웃음이다.
 
  선배님,
 
  그 웃음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2008년 2월 1일
   
 
  손호철/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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