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초여름 어느 날이었습니다. 신학교 동기생이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10여 년이 넘게 된 만남이라 반가웠고 또 한편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궁금함도 많았습니다. 저녁 8시부터의 만남은 자정을 넘어 1시쯤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거의 일방적이다 싶은 친구의 얘기를 들어 주고 들어 주다 못해 드디어 조금은 짜증이 난 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삶을 문제로 보고 사는 이들이 태반입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매일 그 문제를 푸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너는 어떻게 된 것이 다 문제투성이냐. 정치도 문제고 경제도 문제고 신학교도 문제고 교회도 문제고 가정도 문제고 ...어떻게 너는 문제집만 쌓아 놓고 사니? 해답집은 하나도 없이 말야!"
"형,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지 않니? 우리가 지금 4시간이 넘게 얘기를 했는데,
너는 다 문제로만 보고 있지 않니. 이 말 잘 들어 봐. 문제는 없는 거야. 문제가 있다면 네가 그런 것들을 문제라고 보는 그 눈이 문제지."

남편도 문제고 자식도 문제입니다. 자녀가 공부를 잘 해도 문제고 못해도 문제입니다. 교회가 작아도 문제고 커도 문제입니다. 사업이 안되어서 문제고 잘되어도 문제입니다. 국민소득 1만 불이 넘으면 문제가 없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300불 때보다 문제는 더 쌓이고 쌓입니다. 문제는 없어지기는 커녕 갈수록 새롭게 생기는 것이 인생사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누가 문제로 내주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로 내준 사람도 없는데 그런 것들을 문제로 알고 끙끙대며 풀고 있으니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요. TV나 언론에서 문제로 보면 모두가 그 바람에 휩쓸려 문제라고 합니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애벌레에게는 앞에 있는 것들이 다 문제입니다. 앞에 있는 돌덩이도 문제고 냇가도 문제고 막대기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비에게는 그런 것들은 구경거리가 됩니다. 애벌레가 막대기를 치우고 돌을 치워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의 삶이 인간의 의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삶의 형태라면,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로 살아가려는 신앙하는 삶인 영성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애벌레가 막대기를 치우고 돌을 치우고 냇가에 다리를 놓고 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식으로는 인간 구원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바로 애벌레가 변하여 나비가 되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없어지고 오히려 그런 문제나 장애가 구경거리고 은총이 된다는 이 거듭남의 신비,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영생하는 삶의 방법입니다.

산행을 하려 했는데 비가 와서 망쳤다고 합니다. 날씨는 충실히 자기 일을 했는데 날씨가 자기 기분을 망쳤다는 것입니다. 잘 살펴보십시오. 망친 것은 날씨가 아닙니다. 망치고 상한 것은 자기 마음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날씨를 어떻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자기를 망쳤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나 날씨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어떻게 해보려는 삶의 태도로 세상사를 보니 다 문제로 보이는 거겠지요.

그런데 이런 부정적 감정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습니다. 비가 와서 산행을 망쳤는데 누구 기분이 나쁜 것입니까? 비입니까? 나입니까? 우리는 그 동안 이런 공부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탐구를 해보지 않았습니다. 비가 와서 내 기분이 상해 있는 동안 어떤 사람은 그 비를 맞으면서 연인과 사랑을 속삭였을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더구나 가뭄에 시달리던 채소들이 그 단비에 목마름을 해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그 비를 탓하고 원망하고 그 비가 산행을 망쳤다 합니다. 이런 식으로 탓하고 원망하는, 한 번도 검증되지 않은 유치한 원리들, 그 삶의 방법을 따라 살고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우리 믿는 자들도 그리스도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여, 주여는 녹음기도 할 수 있고 앵무새도 할 수 있습니다. 깨어나십시오! 지금 누구를 원망하거나 그 무엇을 탓하고 있다면 그것은 환상을 갖고 자기 환상에 현실이 맞추어지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것입니다. 어린애 짓이지요. 살았으나 죽은 삶입니다.

기차표를 사려고 줄을 지어 서 있는데 누군가가 새치기를 합니다. 그때 화가 나고 마음이 상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새치기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규칙대로 줄을 잘 서 있는 사람입니까? 잘못한 사람은 괜찮은데 줄 잘 서고 기다리는 사람이 왜 화가 날까요? 이것 참 묘하지 않습니까?

깨어난다는 것은 내 안에 이미 형성된 그런 조건들을, 규정들을, 틀들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떠남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가르침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동안 형성된 자기 틀, 규정, 사고방식, 라이프 스타일을 떠나 그분께서 지시하는 대로 새롭게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형성된 조건들을 알아차리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면 거기에서 저절로 변화는 일어납니다. 내가 변하고 싶어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변화는 에고의 장난입니다. 변화는 저절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더럽다느니 깨끗하다느니, 좋다느니 싫다느니 하는 등의 부호가 떨어져 나가고 똥이 똥으로, 밥이 밥으로 보이는 순간,바로 그 순간 속에 영생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삶은 느끼고 즐겨야 할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삶을 신비로 보는 눈이 열릴 때에 비로소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지 사실 있음 그대로를 보지 않습니다. 사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구원이요, 사랑은 거기서 시작이 되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그분께서 생사 화복을 주장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싫다고 하고, 내 마음에 든다고 좋다고 하는 것은 아직 그분을 주님으로 믿지 않고 있다는 스스로의 의심을 탄로내는 것이지요.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관념이나 생각이 아닙니다. 또한 그런 느낌만도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그런 사실의 세계를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제게는 잊을 만하면 꾸는 꿈이 있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때 고생했던 원뿔 면적을 내는 문제를 만납니다. 그러면 애를 태우고 어떤 때는 땀을 흘리고, 친구 시험지도 훔쳐보는 꿈입니다. 그 문제를 풀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꿈입니다. 안절부절하다 깨어 보면 그것은 꿈일 뿐이었습니다. 깨어나보니 풀 문제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깨어나지 않은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는 한 성현의 말을 다시금 상기해 봅니다. 사람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이셨습니다. 깨어나야 한다는 말씀이십니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삶은 느끼고 즐겨야 할 신비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는 것 바로 신앙의 신비요 영성의 길입니다.
<전원교회 목사 . 영성수련원 원장>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삶을 창조적 예술로 가꾸는 것

베토벤의 운명을 들으면 가슴이 뛰고 고흐의 자화상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김대성의 석굴암 앞에 서면 미소가 지어지고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앞에 서면 입이 벌어집니다. 그야말로 예술입니다. 예술은 사람의 감정을 움직여냅니다. 기쁨을 주고, 생각을 더하게 하여 희망을 일으키고, 몸을 동하게 하여 아름다움을 지어냅니다. 설악의 천불동 계곡을 보고 감탄하고 돈황의 월아천을 보고 탄성을 지어냅니다. 나타난 모든 것들이 다 예술입니다.

예술은 사람 속에 잠재해있던 온갖 느낌과 생각들을 알아차리게 해줍니다. 어떤 그림은 내 안에 있는 그리움을 그려주고, 어떤 음악은 내 안에 있는 실연의 슬픔을 노래해주고, 어떤 조각품은 내 안에 있는 꿈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씨앗이 꽃으로 피어나고,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도 정말 예술입니다. 예술은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사람은 어찌하든지 감동 속에 있어야 합니다. 태초에 감동이 있었습니다. 감동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니 감동이 곧 하나님과 함께 하는 접촉입니다. 감동 없이 어찌 산에 오르고 감동 없이 어찌 바다에 가겠습니까. 그러할진대 감동이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형벌 중의 형벌이 아닐까요.

삶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삶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먹는 것을 금하고 마시는 것을 절제합니다. 삶은 예술입니다. 명품이나 명작은 그냥 저절로 생겨나는 우연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명품이나 명작에는 분명한 주제가 있고 소재가 새롭습니다. 그런 명작과 명품을 창조해낸 예술가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선생님을 찾고 찾았더랬습니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고, 수련에 수련을 거듭합니다 그 끝에 장한나가 나오고 고흐가 태어나며 월드컵4강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창조성을 만나서 자율을 산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했고 이순신이 그러했습니다. 달마가 그러했으며 플라톤이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삶을 아름답고 거룩한 작품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삶의 예술가들입니다. 예수는 어떤 분이실까? 붓다, 노자는 과연 어떤 분이셨을까? 우리와 다른 성정을 갖고 태어났을까요? 우리가 없는 그 어떤 신체기관을 더 갖고 계신 분이셨을까요?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의 우리보다 어떤 면에서 학식이 적었고 신체적으로는 튼튼하지도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삶을 가꾸신 분들이십니다. 일상을 거룩한 예술로 승화하신 분들입니다. 매일 일상의 삶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신 삶의 예술가들이십니다. 예술이 있어 예술가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술가가 있어 예술을 낳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삶의 예술가들입니다. 주제를 찾고 소재를 모아 명작을 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낙서하듯이 살 수 없고 장난치듯이 흘릴 수 없는 인생이지 않던가요. 예수가 50이 넘은 나에게는 종교인으로서의 모습보다는 삶의 예술가로 나타납니다. 삶의 예술가 예수. 삶의 예술가 붓다. 삶의 예술가 이순신.

지구별은 이미 삶의 예술가들로 가득합니다. 나도 나만이 창조할 수 있는 삶의 예술이 있지 않을까요. 삶을 예술로 가꾸기 위해 생각에 생각을 하고, 몸으로 해보고 또 해봅시다. 우리는 모두 삶의 예술가입니다.

장길섭/삶의예술 하비람연성수련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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