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는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해서 꼭 그 길을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

일다운 일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애국자는 많으나 무엇이 애국인지는 모른다,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서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돌베개를 찾는다. 어느 지점에서 내가 베어야 할 그 돌베개가 나를 기다리겠는가

-돌배게 중-

신뢰와 정치

4.29 재보선 이후 불거진 한나라당 내 계파 갈등을 무마하기 위해 친이명박 쪽의 '김무성 원내대표' 제안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두 차례나 매몰차게 거절하자, 한나라당 중진인 중도파 K의원은 "큰 정치인인 박 전 대표가 한 번 더 속는 셈치고 일단은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는 한 집안 식구들에게도 무척이나 신뢰를 잃은 모양이다.

요즈음 어디를 가나 녹색성장 얘기다. 언론매체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녹색성장에 대한 기사를 내고 있다. 심지어 고등학교 정문에도 녹색성장 구호가 걸려 있다. 사실, 녹색성장이라는 개념이 새로운 것도 아닌데, 정부 각 부처마다 공무원들이 녹색성장을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느라고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민의 반응은 별로 신통치 못한 것 같다. 정부가 정말 녹색성장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려고 한다면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 것이 아니라 우선 차분하고 진실한 설득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것부터 해야 한다고 어느 학자는 말한다.

녹색성장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4대강 정비사업대하여 많은 전문가들이 반대하는 데에는 정부에 대한 불신도 상당히 작용하고 있다. 이 사업이 한반도대운하사업과 관계없다고 정부 관계자들이 틈만 나면 강조하지만, 이들의 말을 정말 믿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대통령이 직접 확실하게 한 마디만 해도 불신이 꺼질 것 같은데, 그러지 않으니 불신이 더 커지고 있다.

신뢰의 정치적 중요성을 역설할 때 자주 인용되는 고사는 중국 춘주전국시대의 명재상이었던 관중(管仲)의 얘기다. 중국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던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역사상 재미나는 일화가 가장 많았던 시절이다. 관중은 당시 2등 국가였던 제(齊)나라를 최강국으로 만든 1등 공신으로서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재상으로 꼽힌다. 관포지교(管鮑之交)로도 널리 알려진 관중은 신뢰를 정치의 으뜸으로 삼았다. 관중이 얼마나 신뢰를 소중하게 생각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제나라가 노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겨서 노나라 땅의 일부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그런데 회담장소에서 노나라 장군 한 사람이 갑자기 제나라 왕(제환공)에게 달려들어 목에 비수를 들이대며 노나라 땅을 포기할 것을 공식 선언하라고 협박하였다. 겁에 질린 제환공이 포기선언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 장수는 얼른 제 자리로 돌아가 시치미를 떼고 앉아 있었다. 뒤늦게 화가 난 제환공은 방금 전의 선언이 무효임을 주장하려 했으나 관중이 나서서 말렸다. 아무리 협박에 의한 것이라도 군주가 한 번 선언한 약속을 어기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간곡하게 간하였다. 영특한 제환공도 그 깊은 뜻을 알아차리고 관중의 권고에 따랐다.

제나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중의 정치 덕분에 춘추시대에 가장 번성한 국가가 될 수 있었다. 다른 나라들도 제나라 정부의 말이라면 굳게 믿고 따라주었다. 그래서 제환공은 춘추시대에 천하를 호령하는 첫 번째 패자가 되었다. 그런 제환공도 관중을 특별히 예우했다. 아무리 왕이지만 관중과 면담하고 싶을 때면 직접 찾아갔지 사람을 시켜 부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신뢰와 사회적 자본

신뢰는 경제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때부터 국가 경쟁력을 강조하여왔고, 녹색산업과 녹색기술을 경제성장의 새로운 원동력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성장의 원동력은 정부에 대한 신뢰, 그리고 국민들 사이의 신뢰다.

우리는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엄청난 불편과 비용을 치른다. 예를 들어서 슈퍼마켓에서 누가 보든 보지 말든 모든 사람들이 제 각기 정확하게 물건 값을 내고 나간다고 하면, 경비원이나 돈 받는 사람이 필요 없어지게 되니 가격도 2,30% 더 싸진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인 상황이기는 하다. 그러나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의 수가 많아질수록 경비원이나 돈 받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게 되고 그 만큼 상품의 값도 비싸지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들 사이의 높은 신뢰는 경제활동의 비용을 줄여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물건을 살 수 있게 한다.

노사분규가 생산의 차질을 가져와 해마다 막대한 국민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는데, 대부분의 노사분규가 노사 간의 불신 때문에 발생하거나 증폭된다. 만일 노사 모두 상대방을 배려하고 신뢰한다면 아마도 노사분규는 상당히 줄어들었거나 쉽게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단순히 이것만으로도 국민경제에 엄청난 이익이 발생한다.

신뢰는 상거래를 활성화하고 생산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국민의 세금도 크게 절감시켜 준다. 국민들의 외식이 늘어나고 가공식품이 늘어남에 따라 불량식품이 국민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식품업자들이 믿을 수 있게 행동한다면, 불량식품 문제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건강이나 안전에 관계된 각종 규제기관을 만들어야 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해야 한다. 각종 불공정행위나 사기기타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각종 감독·감시제도, 각종 보증제도, 판·검사제도, 기록보관소, 공증제도, 등 그 수많은 공공기관들의 유지에 소요되는 막대한 국민의 세금은 결국 우리가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고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치르는 대가이다. 국민들 사이의 신뢰가 강하면 이런 제도들의 필요성은 크게 감소하고 따라서 그런 제도의 유지에 소모되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도 크게 줄어든다.

신뢰의 경제적 가치가 구체적으로 밝혀지면서 "사회적 자본"이라는 용어를 쓰는 학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신뢰(Trust)>라는 저서에서 후쿠야마 교수(존스홉킨스대)는 사람들이 어떤 공동목적을 위하여 조직이나 집단을 구성하고 상호이해와 신뢰아래 서로 협력하는 능력을 사회적 자본이라고 정의하였다. 퍼트남 교수(하버드대)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자발적 연대나 결사(結社) 내지는 사회적 연결망을 사회적 자본으로 정의하면서 이 연결망의 핵심으로 신뢰를 꼽았다.

확실히 신뢰는 사람들 사이의 자발적 협동을 일구어내는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사회적 자본을 단순히 신뢰로만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신뢰가 사회 전체에 유익한 자본이 되는 상황이 있고 그렇지 않은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의리로 똘똘 뭉친 범죄 집단은 여러 가지 사회악을 초래한다. 사회적 자본을 단순히 사회적 연결망으로만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 반사회적 단체도 자발적인 사회적 연결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자본은 단순한 신뢰나 신의 그 이상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회적 자본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어느 정도 도덕적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물론 도덕심이 없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들끼리도 자발적 협동이 잘 이루어질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이점을 늘 강조한다. 그러나 도덕심을 결여한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의 자발적 협동은 아주 한정된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이 분야 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이다. 예를 들면, 협동에 필요한 사람의 수가 아주 적어야 하고 이들 각각이 먼 미래를 내다보고 행동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만일 사람의 수가 조금 많거나 근시안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의 협동은 매우 어렵다. 사람의 수가 많을 경우 협동에 필요한 조건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 내지는 이타심을 바탕으로 하는 신뢰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회적 자본의 핵심은 단순한 신뢰가 아니라 이타심을 바탕으로 한 신뢰다.

불량아의 정리(Rotten Kid Theorem)와 합리적 이타심

그렇다면 그런 이타심은 어디에서 함양되는가? 많은 학자들이 가정을 지목한다. 그 동안 후쿠야마 교수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가정과 사회적 자본 사이에 밀접한 관계를 지적하고 설명하여 왔다. 그러나 경제학의 관점에서 그 관계를 수학적으로 설명한 학자는 아마도 시카고대학교의 베커(G. Becker)교수가 처음일 것이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그는 우리나라에 와서 특강을 하기도 했다. 이타심에 대한 그의 경제학 이론은 가정과 사회적 자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단초를 제시하고 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부모는 이타심을 가지고 가족 모두의 복지를 늘 염두에 두면서 헌신적으로 가정을 꾸려나간다. 원래 가정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마치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즉, 가격기구)이 거래당사자들 사이의 상충된 이해관계를 적절히 교통정리 하듯이 가정에서는 부모의 사랑 어린 보살핌이 가족구성원들의 다양한 요구를 적절히 교통 정리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족 구성원 그 어느 누구도 이기적으로 행동해봐야 소용이 없다. 예를 들어서 형이 제 욕심만 생각하고 동생한테 1만 원을 뺏어갔다고 하자. 그러면 부모는 동생의 용돈을 만원 올려주는 대신 형의 용돈을 1만 원 삭감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형은 얻는 것이 없다. 따라서 형은 이기적으로 행동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가족구성원 모두가 그럴 것이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동생이 불량배들에게 용돈을 뺏겨서 울고 있다고 하자. 이것을 보고 측은하게 생각한 형이 동생을 도와주기 위해서 동생에게 2만 원을 주었다고 하자. 그러면 부모는 그 형이 기특해서 용돈을 2만 원 이상 올려줄 것이다. 결국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익이다. 형뿐만 아니라 가족구성원 모두가 이타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가정이란 보통 이런 것이다.

물론 용돈에 관해서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소비 그리고 복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형이 동생의 밥을 뺏어 먹어서 동생이 배를 곯고 있다고 하자. 이것을 보고 가만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부모는 당장 그 동생에게 밥을 주는 반면, 형은 뺏어 먹은 만큼 밥을 먹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배고파하는 동생에게 형이 자기의 빵을 주고 자신은 쫄쫄 굶었다고 하자. 이것을 보고 가만있을 부모가 또 어디 있겠는가. 부모는 당장 그 형에게 충분한 보상을 제공할 것이다.

이런 예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부모가 가족구성원 모두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면 가족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서 자신들도 다른 가족들에게 이타적으로(혹은 이타적인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듣고 보면 상식적인 얘기다. 경제학자들이 늘 그렇듯이 베커 교수 역시 이런 상식적인 얘기를 복잡한 수학을 이용해서 하나의 정리(定理)로 정리하였다. 이 정리가 바로 유명한 '불량아 정리(Rotten Kid Theorem)'다. 이 정리에서 베커 교수가 보인 것은, 정상적인 가정에서는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굳이 이런 경제학의 논리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이타심이라고 하면 가정을 연상할 정도로 건전한 가정은 이타심이 주도하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집단이다. 그래서 많은 연구들이 사회적 자본의 산실(産室)로 가정을 최우선적으로 꼽는다. 그렇다면, 만일 부모가 이타적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불량아 정리'와 나란히 베커 교수가 증명한 '시기심에 대한 정리'가 이 궁금증을 풀어준다. 만일 부모가 가족들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봉사해주지 않는다면(다시 말해서 이타심의 중심축이 없다면), 가족들 사이의 시기심이나 이기심은 가족의 해체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가정은 이타심이 함양되고 퍼져나가는 사회의 중심단위가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불량아 정리와 시기심의 정리는 가정에만 적용되는 이론은 아니다. 다른 집단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헌신적인 사장과 소수의 이타적인 간부가 이끄는 회사는 높은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 베커 교수는 "경제생활에서 이타심의 역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막중하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타심에 대한 베커 교수의 이론은 우리에게 두 가지 큰 시사점을 던진다. 그 첫 번째 시사점은, 건전한 가정은 사회적 자본이 형성되는 원천으로서 경제적으로도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건전한 가정은 경제를 튼튼하게 해주며 우리 사회를 좀 더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어주는 사회기반시설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가정은 가족 구성원 개인에게도 이익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이익이다. 이런 의미에서 건전한 가정의 유지는 개인적인 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일이요 따라서 가족 구성원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성장동력으로 녹색성장만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건전한 가정의 육성에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두 번째 시사점은 사회지도 계층이 믿을 수 있게 행동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경쟁력 있는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의외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기적이므로 이를 현실로 인정하고 이 이기심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늘 주장한다. 이들 대부분은 이타심의 함양에는 관심이 없다. 물론 이타심의 함양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베커의 이론은, 마치 가정에서 부모의 이타심이 중심축이 되듯이 사회에서는 사회지도계층이 이타심 확산의 중심축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 모두가 똑같이 이타적일 필요는 없다. 오직 사회지도계층이 믿을 수 있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를 밝고 튼튼하게 만드는데 충분하다.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


 

"여러분에게 부탁할 것은 첫째 우리는 역사에 살자는 것입니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길이 살 수 있는 인생을 보내달라 그 말 입니다. 목전에는 어떠한 부정과 불의를 해서 잘 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역사에서는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큰 일을 하면 할수록, 역사에 떳떳한 정당한 길을 걸어갔다는 비평을 받을수 있는 그런 길을 걸어주길 부탁드립니다.
 
둘째로, 나는 역사의 신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의나 진리 혹은 선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때마다 좌절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렇때는 정말 하나님이 있는 거냐 하는 회의감도 생길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다만 역사의 신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세계역사 과정을 볼 때에 반드시 정의나 진리나 선은 실현된다는 그런 역사의 신을 나는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역사의 신이 있다는 것을 믿어주길 바라고 정의와 진리와 선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셋째로 1945년 이후에 우리 민족에 부과된 역사적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다함께 힘을 합쳐서 발전해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직장에 있던지 간에 이나라의 통일과 민주와 경제발전, 새 문화의 창조, 그리고 정의롭고 평등한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복음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답이다.

장공은 복음이 사회의 답임을 보여준 이 시대의 큰 스승임이 분명하다.

장공이 작사한 찬송가 261장은 이 시대의 예수쟁이들이 살아가야할 방향을 명쾌히 보여준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1. 어둔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속에 새롭다 이빛 삶속에 얽혀 이땅에 생명탑 놓아간다
2. 옥토에 뿌리는 깊어 하늘로 줄기 가지 솟을 때 가지 잎 억만을 헤어 그 열매 만민이 산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일꾼을 부른다 하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리
3. 맑은 샘줄기 용솟아 거치른 땅을 흘러 적실 때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 앞에 활짝 트인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하늘 새땅아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되어 타거라

복음은 나 하나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가르친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역사 속의 교회를 역설하는 이 찬송(261장) 가사를
쓴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장공(長空) 김재준 목사. 그가 없었다면 한국교회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부끄러운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장공은 한국교회의 사회참여운동에 앞장서며 민주화
운동에 교회가 적극 뛰어들도록 길을 폈고 보수 일색으로 경직됐던 한국 신학계에 현대신학의 물줄기를
들여와 교회 갱신에 힘써 ‘한국교회의 영원한 스승’으로 불린다.

장공은 1901년 함북 경흥의 유교집안에서 태어났다. 한문과 서예에 능통했고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금융조합 서기라는 안정된 직업을 뒤로 하고 1920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YMCA의 시국강좌에 참여하고
도서관의 현대서적들을 탐독하면서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이듬해 승동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장공은 기독교를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신학교를 거쳐 1928년 도미,프린스턴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받으면서 당시 구미를 풍미했던 현대신학 사조를 접하게 된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대부분 근본주의적
신학만 소개한데 비해 미국 본토의 신학은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성서비평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국내에서도 성서비평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성서를 신앙이 아닌 학문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매우 낯선 일이었다.
 

1935년 일제 식민치하의 한국교회는 큰 전환기를 맞이한다. 조선예수교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선교사들이 모두 철수한 것이다. 서양 선교사가 이끌었던 평양신학교도 문을 닫았다. 민족 정신의
최후 보루였던 교회마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갈 지경이었다.
 

장공은 이때 송창근 김대현 등과 함께 ‘조선신학교’를 개교한다. 서양 선교사들이 돌아가 재정 지원 한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조신인 스스로 조선 교회의 목회자를 육성해내는 자주적인 신학교육기관을 세운 것은
순교자적인 결단이었다.
 

장공은 조선신학교에서 성서비평학을 소개하며 한국교회에 충격을 던졌다. 격렬한 신학논쟁이 일어났고 결국
해방뒤인 1953년 장공은 파면된다.
 

장공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성직자들과 함께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을 창설하고
한국교회를 변혁할 목회자 양성을 위해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을 설립한다.
 

1965년 굴욕적인 한·일 수교를 계기로 장공은 사회참여운동에 뛰어든다. 유신헌법 반대,반독재 민주화,민족통일
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주주의와 평화,인권과 생명 수호에 앞장섰다.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의 현실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폭정에 맞섰던 장공은 1987년 1월27일 민주화 운동의 결실을 미처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장공은 신학 연구의 자유,현실 참여의 열정과 함께 신앙의 경건성을 강조했다. 그는 후배 신학자들에게 늘
그리스도의 마음이 살아있는 신학을 공부하라고 말했다.
 

근본주의적인 한국교회에 큰 충격을 주고 생명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상을 제시한 장공은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 독재정권 치하에서 종로5가를 중심으로 한 한국교회가 민주화의 성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장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주화와 신학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12월 장공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김지방기자 fattykim@kmib.co.kr

 





 


불감증에 걸린 현대인

바쁜 도시 생활에 쫓겨 사는 우리들은 어느덧 느끼고, 체험하고, 감탄할 수 있는 마음을 잃고 살아갑니다.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가장 큰 병은 다름 아닌 불감증입니다. 이들은 머리 속에는 많은 지식과 생각들이 있지만 자기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무감각할 뿐만 아니라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겨울산에 함박눈이 내려도, 눈꽃이 피어도, 그 아름다운 계절을 느끼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벌까 하는 머리만 쓰며 삽니다. 어릴 적에 눈이 내리면 들로 산으로 뛰어 달리며 연도 날리고 썰매를 타고 다녔는데, 요즘 아이들은 방에 갇혀서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돈을 주고받는 일회용 사랑에 익숙해져 사랑하는 님이 내게로 다가와 입맞춤을 해도 그 달콤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배고프고 헐벗은 가난한 이웃이 쓰러져 손을 내밀어도 무감각하게 그 자리를 지나갈 뿐입니다. 아프간에서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이 폭탄에 맞아 죽어 가는 것을 보고도 놀라지도 분노를 느끼지도 않습니다.

가슴과 머리로 살아가는 사람

그것은 현대인들이 무엇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가슴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해방신학자 중에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은 가슴(파토스)과 머리(로고스)로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먼저 가슴(파토스)으로 느끼고, 머리(로고스)로 판단해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먼저 가슴으로 느끼고 나서 저 산을 어떻게 오를 것인가 머리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머리가 먼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아, 저 여인은 참 아름답구나”하고 먼저 가슴으로 느낌이 팍 오지요. 그리고 나서 어떻게 저 여인의 전화 번호를 알아낼까, 어떻게 해서 만나자고 할까 등등 머리 속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슴 없이 머리로만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 여자가 돈도 많고 집안도 좋고 내 출세에 지대한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한번 꼬셔봐야지.” 그러나 그런 만남은 100% 불행해 지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것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할 때도 먼저 머리로 계산을 하고 나서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뭔가 필이 오고 나서 나중에 머리로 계산을 하고 수지가 맞으면 행동으로 옮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람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먼저인 것입니다.

머리로만 살아가는 사람

오늘날 현대인들은 가슴은 잃어버리고 머리만 남았습니다. 정치인들이 그렇습니다. 국민의 아픔, 국민의 걱정거리, 국민의 바램은 아랑곳하지 않고 온통 당리당략에 골몰하며 사는 인간들이 정치인입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까지도 머리만 비대해졌습니다. 십일조를 하고 헌금을 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문에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러 감옥에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머리로 살아가는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부모들은 자식들을 모두 머리만 뛰어난 사람으로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비싼 과외를 보내고 학원을 보내고 해서 가슴은 한없이 빈약하면서 머리만 비대한 아이들을 만들려고 합니다. 나중에 그런 아이들이 성장하면 또 머리로만 살아가게 되고 부모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

신앙인은 모름지기 머리보다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슴으로 산 대표적인 신앙인은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그는 로고스로 산 사람이 아니라 파토스로 산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로부터 외투 하나 물려 입었을 뿐 가난과 결혼해서 평생을 청빈하게 산 파토스의 사람이었습니다. 들꽃과 이야기를 하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향기를 맡았으며, 자기를 온전히 비워 그리스도를 닮아가려 했습니다. 가슴으로 산 그를 사람들은 성자라고 칭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시퍼런 국가보안법이 살아있고 철조망이 가로막혀 있지만, 홀로 휴전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넘어서는 안되고, 넘을 수 없다고 여기는 휴전선 철조망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남과 북의 분단선을 훌쩍 넘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늦봄이 머리로 행하는 일이 아니라 가슴으로 넘은 것입니다. 이렇게 가슴으로 분단선을 넘은 그에게 사람들은 통일의 사도라고 칭했습니다.

이 땅에 어머니들은 머리로 살지 않고 가슴으로 사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어린 자식과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살아왔고, 그 힘으로 이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었습니다. 이 어머니들은 예수를 믿어도 머리를 써가며 잔꾀를 부리며 믿지 않고 두 무릎으로 예수를 믿었습니다. 한국의 새벽기도는 어머니들의 가슴으로 정성을 드리는 성소가 되었습니다.

옛날 인디언들은 넓은 초원을 말을 타고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다가 초원 한가운데 말을 세워 놓고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머리와 몸이 너무 앞서와서 아직 쫓아오지 못한 가슴과 영혼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성이란 머리와 가슴이 일치하는 것, 너무 앞서간 머리를 잠시 식혀 아직 오직 못한 가슴을 기다리는 것이 바로 신앙훈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슴과 십자가, 그리고 걸레

머리를 주로 쓰는 사람은 손이 게을러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습니다. 참 가슴의 소유자만이 십자가를 능히 짊어질 수 있습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은 손이 먼저 나가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가슴으로 느끼고 바로 손이 나아갑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이것저것 궁리한 끝에 자기에게 이로울 때만 손이 나갑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 머리가 좋은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고, 도마는 주님을 의심했습니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서 손과 발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대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그나마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고 희망이 있는 것은 머리로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손과 발로, 따스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구체적인 모습을 땟구정물이 줄줄 흐르고 갈기갈기 떨어지고 방 한구석에 내팽개쳐진 걸레에게서 봅니다. 우리 시대에 십자가는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더럽고 오염된 곳을 닦아내는 걸레입니다. 십자가가 죄 많은 우리를 회개하게 해 주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듯이, 걸레는 자기를 희생하여 더러운 곳을 닦아 세상을 아름답게 해 줍니다.

안도현이라는 시인이 쓴 글중에 아주 짧은 시가 하나 있습니다.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는 건
걸레가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기 몸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방안을 깨끗하게 하는 걸레처럼,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으신 분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언제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늘진 곳에 홀로 앉아 걸레처럼 가족을 위해 헌신할 뿐입니다. 차가운 마루 한 구석에 던져져 얼어 비틀어진 걸레가 바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강남향린교회에서 걸레를 가장 많이 들고 있는 부서가 어디입니까? 바로 여신도회입니다. 여신도 회원들은 교회의 구석구석을 걸레를 들고 다니면서 닦고 닦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위하지 않고 어린이부 어린이에서부터 나이 드신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보살필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그늘지고 소외된 이들까지 살피고 따스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합니다. 아마도 여신도회가 없다면 오늘날처럼 강남향린교회가 아름답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걸레와 성자 어머니

여러분들도 걸레질을 한두 번 해보아서 잘 알겠지만, 허리를 굽히고 두 무릎을 꿇고 한 손을 집고 걸레질을 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제 어머니가, 제 아내가 집에서 걸레질을 하는 것을 보노라면, 차라리 ‘저것은 기도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가끔 걸레질을 좀 해 보는데 그것은 기도하는 것보다 더 힘이 듭니다.

마치 중세 수도사들이 두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며 참회하는 심정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 어머니가 걸레를 들고 바닥을 닦고 벽을 닦고 유리창을 닦아 집안을 아름답게 닦는 걸레질이야말로 거룩한 종교적 수행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찾고 따라야 할 거룩한 이, 곧 성자를 먼 곳에서 찾지 않습니다. 바로 제 어머니가 성자요, 제 아내가 성자요, 바로 걸레를들고 더러운 곳, 그늘진 곳을찾아가 따스하게, 아름답게 닦아주는 여러분들이 성자이십니다. 성자란 누구입니까?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희생

하고 자기를 헌신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과 평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이 아닙니까? 바로 걸레처럼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여 하늘의 평화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오늘 성서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평화를 이루려 헌신하는 걸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대에 우리가 주님을 믿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직접 걸레를 들고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닦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지극히 인간적인종교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우리 에게 해탈(解脫)이나 도통(道通)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뿐입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내 십자가는 누가 지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당신이 직접 짊어지고 가셨듯이, “너도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내가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내가 내 십자가를 나 자신이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하는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 의 핵심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지셨으니 나는 안 져도 된다, 예수께서 대신 지신 십자가로 나는 가만히 앉아 기도만 하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십자가는 있지만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갈 참다운 신앙인은 없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교회에는 예수의 십자가는 사라졌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과 헌신의 삶 없이 영광과 축복만을 부르짖는 교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사칭하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 불과합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없고, 예수의 삶이 없고,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는 한국교회, 오직 예수의 보혈의 피만 부르짖는 교회에서 우리는 예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상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걸레가 되어야 할 교회

교회는 이 세상에 걸레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고 내어놓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닦고 닦는 걸레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은 어느 날 갑자기 성령의 불을 받아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면서, 우리가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걸레가 되어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걸레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신앙은 타력적, 이타적, 의존적 신앙이 아니라 자력적, 주체적 신앙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진정제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삶의 고통을 잠시 잃게 해주는 각성제, 진통제가 아닙니다. 삶의 깊은 문제들에 대하여 즉각적인 해답을 주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친히 두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것, 걸레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걸레로 오셨습니다. 죄 많고 더러운 마음을 가진 우리 인간 세상에 오셔서 하늘의 말씀으로 우리를 닦아주시고, 병들고 힘없는 이들을 다시 세우시고, 마침내 십자가를 친히 짊어지심으로 우리에게도 걸레와 같은 삶을 살아 이 세상을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로 가꾸라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걸레로 마음을 닦아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삼으십시오

사랑하는 강남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걸레의 삶을 살아 가야 할 우리에게 가장 잘 닦아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그 곳은 다름 아닌 우리의 마음입니다.마치 우리의 어머니가 신새벽에 장독대에 올라 아주 깨끗한 하얀 걸레로 장독을 정성을 다해 닦아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닦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닦고 닦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질그릇이지만, 그 질그릇 안에 보화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계십니다. 내 마음이 더럽고 오염되어서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뿐 주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계십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의 마음을 말씀의 걸레로 닦고 닦으면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의 모습을 밝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여러분은 거룩하고 신령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를 이 세상에 속해 있으나 모두들 하늘의 시민권자들이라 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하는 일은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거룩한 일입니다. 삶의 성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걸레가 온전히 자기를 비워 주님을 모시는 삶을 사는 것처럼, 사랑하는 여러분의 삶도 성자 걸레처럼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희생의 삶을 통해 더러운 곳, 그늘진 곳, 아프고 고통받는 곳으로 가서 친히 자신이 걸레가 되어 그들을 닦아주고 위로 해주고 치유해 주고, 그래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나가시는 여신도회와 강남향린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아멘.

기도는 나를 살리고 타인을 살리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 기도가 이웃을 살립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은 내 소망, 내 꿈, 내 생각을 이루는데 있지 않고,
더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내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기도는 내 삶의 일부, 내 시간의 일부를 드리는 지극히 습관적이고 요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혁명적인 행위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야말로 옛사람을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새 사람이 되는 종교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자신의 것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에 대해 죽는 행위이며,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거듭남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이 세상에 속해있으나 이 세상에 갇혀 있지 않고,
이 세상의 사람이나 하느님의 사람이 되게 하며,
이 세상에 머물러 있으나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는 위대한 신비입니다.
그래서 기도란 그 어떤 것에도 매이거나 갇혀 있게 하지 않고
끊임없이 걷는 길이요 순례의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여정 동안 언제나 새로운 하느님을 대면하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더 필요한 쪽은 누구입니까?
우리입니까?
하느님이십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 더 고생하는 쪽은 누구입니까?
우리입니까?
하느님입니까?"

두려움없는 마음으로 말하기를 "하느님이십니다."
기도는 우리보다 하느님이 더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주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느님은 우리에게 의존하십니다.
십자가에 넘어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며 나약하신 하느님은 철저히 사랑이 필요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인 동시에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갈망입니다.

기도란 한마디로 하느님 안에서 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내 안에 임재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기도는 하느님이 내 안에 살아계셔서 나를 살리고 나를 이끄시는 하느님임을 알게합니다.

그래서 기도란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기도 훈련을 통해
우리는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 눈뜨게되며,
하느님을 내 맥박과 내 호흡 속으로,
내 생각과 내 감정 속으로,
청각과 시각과 촉각과 미각 속으로
우리의 전 존재로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그래서 비로소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머리의 생각과 가슴의 체험을 모두 비울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기도하는 자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하느님의 영임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는 호흡과 같습니다.
우리의 호흡이 중단되면 목숨을 잃듯이 우리가 기도를 중단하면
우리의 영혼은 곧 죽은 것입니다.

바울의 권고처럼
밤이나 낮이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일할 때나 놀 때나,
쉬지 않고 중단 없이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기도는 곧 삶입니다.
기도는 먹고 마시는 것,
움직이고 쉬는 것,
가르치고 배우는 것,
놀고 일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스며듭니다.
기도는 우리가 있는 곳에 하느님도 함께 계시다는 끊임없는 인식입니다.
이렇게 기도의 삶은 바울의 고백처럼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갈 2:22)입니다.

이제 비로소 기도를 통해서 내 삶이 거룩해지고 아버지께서 사시는 은총의 삶이 됩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이란 내가 지금 이 세상에 속해 있으나 하늘의 삶을 살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사는 하느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이 이 거룩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우리는 지금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이 호흡을 하듯 기도하는 삶이 되시고,
삶이 기도요 기도가 곧 삶이 되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심으로
영생의 삶을 사는 성도들 되시기 기원합니다.  아멘.

하느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신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밥상에 앉아 생명의 밥이신 주님을 내 안에 모시며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처럼
오늘 이 아침에
뒷간에 홀로 앉아
똥을 눌 때에도 기도하게 하옵소서.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내 뒷구멍으로 나오는 것이오니
오늘 내가 눈 똥을 보고
어제 내가 먹을 것을 반성하게 하옵시고
남의 것을 빼앗아 먹지는 않았는지.
일용할 양식 이외에 불필요한 것을 먹지는 않았는지.
이기와 탐욕에 물든 것을 먹은 것은 없는지.
오늘 내가 눈 똥을 보고
어제 내가 먹을 것을 묵상하게 하옵소서.

어제 사랑을 먹고 이슬을 마시고 풀잎 하나 씹어 먹으면
오늘 내 똥은 솜털구름에서 미끄러지듯 술술 내려오고
어제 욕망을 먹고 이기를 마시고 남의 살을 씹어 먹으면
오늘 내 똥은 제 아무리 힘을 주고
문고리를 잡고 밀어내어도
똥이 똥구멍에 꽉 막혀 내려오질 않습니다.

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똥 한번 제대로 누지 못하며
살아가는 가엾은 저를 용서하소서.

내일 눌 똥을 염려하지 않고
오늘 내 입으로 들어갈
감미롭고 달콤함에 눈이 먼
장님 같은 내 인생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느님,
어제 먹은 것을
오늘 비우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뒷간에 홀로 앉아 똥을 누는 시간은
내 몸을 비워 바람이 통하게 하고 물이 흐르게 하고
그래서 하느님 당신으로 흐르게 하는 시간임을 알게 하소서.

오늘 똥을 누지 않으면
내일 하느님을 만날 수 없음에
오늘 나는 온 힘을 다해
이슬방울 떨구며 온 정성을 다해
어제 내 입으로 들어간 것들을 반성하며
똥을 눕니다.

오늘 내가 눈 똥이 잘 썩어
내일의 양식이 되게 하시고
오늘 내가 눈 똥이 허튼 곳에 뿌려져
대지를 오염시키고,
물을 더럽히지 않게 하옵소서.

하느님
오늘 내가 눈 똥이
굵고
노랗고
길으면
어제 내가 하느님의 뜻대로 잘 살았구나
그렇구나
정말 그렇구나
오늘도 그렇게 살아야지
감사하며
뒷간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오게 하옵소서.
신앙이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신앙이란 살아있는 그 무엇이다. 학문의 언어로 혹은 교리나 교회 지도자들이 획일적인 말로 설명하는 그 이상의 것이다. 우리의 머리나 관념으로 알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란 몸의 언어요, 삶이요, 생명이다.

신앙은 흔히 교회 안에서 하는 것이며, 늘 교회와 연결되어 있으며 교회의 지도에 따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이란 우리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교리나 교회, 성경책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출발해야 하고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는 어디에 오셨는가? 경전 속으로 오셨는가? 교회 안에 오셨는가? 교리나 교회 지도자들의 입으로 오셨는가? 예수는 말구유에 오셨다. 말구유는 우리의 삶의 상징이다. 말구유는 밥을 나누어 먹는 밥통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온 가족이, 사랑하는 친구들이 밥통에 둘러앉아 밥을 나누어 먹는다. 밥을 나누어 먹는 밥통의 자리, 그것은 우리가 매일 몸 비비고 살아가는 일상의 삶의 자리이다.

예수께서는 33년의 공생애를 사시면서 성경이나 성전, 교회 지도자들의 말에 머물지 않으시고, 가난하고 병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자리에 머물며 그들과 더불어 사셨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주님은 바로 우리의 생활 속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생활(生活)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생활(生活)을 한다. 생활(生活)이란 '살아서(生) 움직임(活)'을 의미한다.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모든 행위가 곧 생활이다. 생명(生命)의 활동이 곧 생활(生活)이라 할 것이다.

농부가 들녘에 나아가 일하는 것, 어머니가 부엌에서 밥짓는 것, 아이가 뒷동산에서 뛰어노는 것, 이른 아침에 참새가 짹짹 소리내며 잠을 깨우는 것, 부엉이가 달빛 아래에서 부엉부엉 우는 것, 이쪽 시냇가에서 저쪽 동산까지 무지개 다리가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 이 모든 아름다운 생명의 몸짓들이 생활이다.

이렇게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생명체들이 각각의 고유한 생명을 활동을 통하여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의 마을 살림터에서부터 무궁한 우주만물에 이르기까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움직임이 생활이라 할 수 있다.

각 생명들의 활동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생명 창조자인 하나님이시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우주만물 속의 뭇생명에게 더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생명 활동을 해 오신 생명의 주관자시요, 모든 생활의 생활자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생활자로 부름을 받았고 생명을 살리는 생활에 참여한다. 생활자는 생명의 활동을 통하여 궁극적인 구원에 이른다. 생활이란 생활자가 생명의 자유롭고 풍성하며 아름다운 몸짓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는 생명체들의 구원방식이다. 그러기에 생활이란 신앙의 출발이며 종착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모시고 생활하셨다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모신 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예수는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씀하셨고 자기가 하는 일은 자기의 일이 아니라 예수 안에 계신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일이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요, 우리의 신앙의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생명의 말씀이다. 그것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너희 안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 "내가 하는 일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몸소 하시는 거룩한 일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 4절에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셨다. 그것은 예수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하나님을 모신 거룩한 존재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2장 33절에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것 또한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들도 역시 그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거룩한 존재하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이다.

우리가 내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되면 우리의 몸은 거룩해지고, 우리의 삶도 거룩해지며, 우리의 생활은 신령해진다. 우리가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일, 손가락 한 번 움직이는 일, 눈 한 번 떴다가 감는 일, 들녘에 나아가 땀 흘려 땅을 일구는 일,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일, 이 모두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각성된 영성을 통하여 우리의 생활은 거룩해지며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사시는 거룩한 삶이 되는 것이다.

이제 삶의 성화, 생활이 거룩해진다. 들녘에 나아가 일하고 밥 먹고 설거지하고 똥 싸고 일하고 바느질하고 아기 낳고 기르는 모든 일상의 생활이 거룩해진다. 뿐만 아니라 내 어머니, 내 아버지의 일이 거룩하며 내 이웃과 친구의 일이 거룩하다. 언덕 위 꽃 한 송이, 시냇물에서 물장구 치는 물방개가 거룩하다. 논과 밭의 알곡이 거룩하며 산과 강과 바닷가 거룩하다.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지 않고는 어떤 생명의 활동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생활은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생활)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그것을 잊지 않고 내 몸을 소중하고 거룩하게 여기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 할 수 있다.

1. 한국신학의 순례자, 안병무

안병무는 한국신학의 개척자요, 순례자이다. 순례자는 언제나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로운 길을 떠나는 자이다.
예수가 변화산 정상에 올랐을 때,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그리고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 베드로는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마태 17장 4절)라고 머물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산 정상에 머물지 않고 민중이 사는 마을로 내려오셨다. 내려가고 내려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음하고 헐벗고 병들어 살아가는 민중의 마을로 내려 오셨다.

순례자는 어느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늘 새로운 길을 떠났다. 베드로처럼 산 정상이 좋다고 머물어있었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처럼 안병무도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길을 떠나는 순례자였다. 그리고 그는 민중의 삶 한복판에 언제나 있었고, 나라를 빼앗기고 수난 당한 민족의 역사와 가난하고 고난받는 민중이 사는 마을에 내려와 민중의 신학을 하고자 했다.

그는 한국신학의 길을 새롭게 개척한 자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 그는 먼저 걸어가 한국신학의 길을 열어 놓았다. 누구나 길을 걸어갈 수는 있지만, 이미 닦여진 길을 걸어가지 않고, 그의 발걸음 하나 하나가 바로 새로운 길이 되었다. 그가 일생을 걸어가 열어 놓은 길은 곧 한국신학의 길, 그 자체였다.

새로운 길을 개척할 때에는 머리로, 혹은 지식이나 강단에 갇혀할 수 없는 것, 안병무가 열어 놓은 한국신학의 길은 한국 역사 한가운데, 恨과 눈물의 바다가 출렁이는 삶 한가운데에서 그가 몸으로 고백하고, 가슴으로 부딪히며 체험하여 닦아 놓은 길이다.

그는 길을 가만히 앉아 생각으로, 혹은 문자로만 가지 않았고, 그의 삶과 역사와 몸으로 친히 걸어갔으며, 그래서 그의 삶이 길이요, 그의 삶이 곧 신학이 되었다.

길은 걸어갈 때에 비로소 길의 존재 가치가 있다. 길을 알고 있는 것과 길을 직접 걸어가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한국신학의 개척자요 순례자인 안병무가 열어 놓은 새로운 길을 따라 많은 이 땅의 신앙인들은 지금도 걸어간다.


2. 민중의 어머니, 선천댁

안병무는 1922년 평안남도 안주군 신안주면 운송리에서 아버지 안봉식, 어머니 정원숙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안씨 집안은 '송성'이라는 동리에서 대대로 한의사를 가업으로 이어왔으며, 그의 아버지도 한의사 자격증을 얻어 간도에서 한의원을 했다. 그러나 안병무는 그 집안의 남성우월적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언제나 가장 밑바닥 삶을 살아왔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의 정이 남아 있다. 그는

하루 종일 밭이나 마당에서 다른 농사꾼과 똑같이 분주하게 일하는, 이른바 남편의 얼굴은 단 한 번도 정면으로 본 일이 없었다. 그러니 말 한 번 나누었을 까닭이 없다. 그래도 가끔씩 지나치다 자신을 훔쳐보는 남편의 눈을 기억하노라고 했다. 선천댁은 그 집안에서 위계적으로 말하면 가장 바닥에 있었다. 그러니 웬만한 일은 위에서 밀려 밀려 마침내는 그에게로 차례가 온다. 온갖 궂은 일은 결국 다 맡아 하는 것이다.([선천댁], 범우사, 8쪽)

여기서 말하는 선천댁은 그의 어머니를 일컫는 말이다. 선천이라는 곳에서 시집을 온 어머니를 마을 사람들은 선천댁으로 불렀고, 그 역시 '선천댁'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를 회상하는 글을 썼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민중이 무엇이냐? 또는 누구냐? 라는 질문에 대하여 피해 왔는데, 그것은 민중에 대한 대답이 '개념화'되어 실체로서의 민중을 박제해 버릴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어머니 '선천댁'의 삶을 통해 민중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하고자 했다.

나는 이 글을 시작할 때 마음에 민중의 실체가 무엇이냐 라는 숙제를 안고 나의 어머니를 모델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결코 비범하지도 않고 특수한 경우도 아니며 우리 주변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자의 일생이라는 데 적극적인 의미를 두었다. 더욱이나 그는 비문자 계열에 속했으므로 이른바 문화권에서 보면 가장 밑바닥을 헤매는 삶이라는 것이 나의 마음을 끌었다.(같은 책, 206쪽)

안병무는 어머니, 선천댁의 몸에서 자신이 태어나던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선천댁은 지금 임신 10개월인 것이다.... 무거운 배에 손을 얹고 땡볕에 수건을 가리우고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가는 젊은 아낙, 선천댁의 모습 - 그것은 그대로 수난자의 모습이다.
밭에서 허리를 굽혀 밭을 가꾸던 그는 그 자리에 쓰러져서 몸부림을 쳤으나 그 주변에 누구도 눈치 채거나 관심을 가져 주는 자가 없었다. 산통이었다. 그런 몸을 갖고도 그는 해산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을 갖추어 놓고 그가 남편과 함께 살도록 정해진 거처에서 이를 악물었다. 땀과 피와 더불어 그는 세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그의 첫째 아들이었다.(같은 책, 14쪽)

아버지가 한의사 자격증을 따자 아버지는 만주를 떠날 결심을 하고, 어머니와 함께 안병무는 국경을 넘어 연변 '연길'로 향했다. 그리고 간도 용정에 정착을 한다. 아버지는 동네 의사로 환자들을 돌보고 어머니는 쉬지 않고 밭일을 하였다. 그런 환경에서 어린 안병무는 그곳에서 소학교를 마치자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그 때 그가 한 일은 교회 젊은 장로가 하던 조끼 만드는 봉재공장이었다.

나도 그 쪽에 배당되어 하루 종일 재봉틀 돌리는 연습 끝에 '재봉사'가 되고 정해진 날에 열리는 장터로 자전거 위에 산더미같이 조끼를 싣고 여러 것 장터로 다니기 시작했다 . 나보다 공부를 못하던 녀석들이 중학교 교표가 달린 모자를 쓰고 접근해 오면 배알이 꼴리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약속한 대로 나 갈 길은 다르다'라는 것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꿀꺽 삼켜 넘길 수가 있었다.(같은 책, 93쪽)

1년 뒤, 소년 안병무는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로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진학을 고 졸업한다. 학교를 다니면서 안병무는 공부보다는 계몽운동을 주도하고 새로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일을 계속한다. 그가 어려서부터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간도라는 토양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며, 어린 시절 독립운동가들이 마을에 와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또 어머니 선천댁이 독립운동가들을 도와주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간도에는 이미 기독교가 뿌리를 내렸고, 기독교신앙과 교육이 활발하게 전파되어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자연스레 받았다. 그러기에 소년 안병무에게는 이미 어려서부터 민족주의와 기독교신앙이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간도지방에서의 삶이 민중신학자 안병무를 민족주의자로, 또 민중신학자로 자라게 하는 씨앗이 이 때에 뿌려졌다고 볼 수 있다. 소년 안병무가 중학교를 졸업하자 선천댁은 그 동안 정성스레 모아두었던 돈을 내어놓으며 계속 공부할 것을 권한다.

나는 이제는 더 이상 너를 도울 길은 없다. 그러나 나는 네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다. 일본 동경에서는 고학으로 공부할 수 있다니까 너는 일본으로 건너가 진학할 준비를 해라. 이것이 내가 그 동안 모아 둔 여행비의 전부다.(같은 책, 108쪽)


3. 제도적 교회에 대한 회의와 한국신학의 기틀 잡기

어머니의 간곡한 간청에 힘입어 안병무는 일본 대정대학교 문학부에 진학을 하고 공부를 계속한다. 그러나 어렵게 공부를 시작한 청년 안병무는 조선 청년들이 지원병, 학병이라는 이름으로 끌려가고 미혼의 여자들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무모한 침략 전쟁에 내보내 자기 군인들을 무마하는 도구로 사용돼는 것을 목격하고, 이런 판국에 더 이상 머무를 이유도 없었고 있을 수도 없어 한국의 학생들은 귀국하였고, 안병무도 문학부 예과 3년을 수료하고 돌아온다.

그는 돌아와 학업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한 신앙, 한 몸, 한 마음을 이루며 살아 보자는 의미에서 '일신회'라는 모임을 구성한다. 그 때에 안병무는 신학을 하지 않은 상태이지만, 교회 개혁을 위한 새로운 교회를 꿈꾸며 '일신교회'를 세우고 예상에도 없던 목회 아닌 목회를 시작하게 된다.

나는 일신교회에서 점차 소문난 설교자로 부각되었다. 사람들이 몰려왔고 청중들의 자세는 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신의 소리인 양 경청하는 것 같았다. 점점 내게 설교자로서의 자부심이 생겼다. 내가 열심히 준비해서 하는 말 하나하나가 저들에게 끊임없는 변화를 일으킨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육체의 병을 고친다는 목사들이 많은 반면 나는 인간을 변화시키고 잘못된 마음을 고친다고 믿게 되었다. 한마디로 나는 들떠있었다.(같은 책, 134쪽)

그러나 6.25는 안병무에게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신뢰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때, 자신이 뛰어난 설교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변화되어 간 것이 아니라 선천댁의 희생적이 사랑이 그들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부끄러워한다.

또한 6.25가 터졌을 때 교회를 구성한 그리스도인들의 작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꼈다. 열정을 가지고 설교를 하여 그들의 변화되는 모습을 보았는데, 막상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리스도인들은 '자루에 담았던 모래알들'이 빠져나가듯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실망을 했다.

공동체란 의식은 전혀 볼 수 없었고, 이웃 사랑의 냄새는 그 어디에서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르며 아끼는 듯하던 저들이 도망 칠 때 단 한 번도 뒤돌아보려는 자도 없었다. 하느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듯 말 한마디를 황금덩이로 여기는 듯 존중하던 설교자를 염려해서 같이 피난하기를 권하는 사람도, 떠나는 마당에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것이 본래 사람의 모습인가. 교회는 이런 인간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없다는 말인가. ..... 내게 구체적인 충격을 준 광경이다. 교회에서 돈푼이나 가진 사람들의 발상으로 트럭을 한 대 구했다. 그 트럭을 빌리는 비용은 교회의 공금이다. 어느 날 새벽에 서울을 탈출하기 위해 그 트럭이 교회 마당에 세워졌다. 그 안에 사는 목사가 새벽같이 그의 책들, 생활 도구들, 장독까지 올려놓아 트럭의 한 모퉁이가 차버렸다. 돈푼이나 교회 바치는 장로들, 말깨나 하는 집사들, 그것도 특수계급이라고 자기들이 가져갈 물건들을 평신도들의 뜻을 물리치고 권리처럼 먼저 싣고 직계가족은 물론 친척들까지도 동원했다. 벌써 자리가 차버린 것이다. 노쇠한 교인들, 힘없는 평신도들이 한 자리 얻으려고 아우성이다..... 아비규환이다. 지옥이 따로 있나! 저들은 이미 지옥행 트럭을 타고 혼자 살아 남으려고 하는 것이다. 도대체 교회란 무엇인가? 일생을 통해 듣고 듣던 그 설교들은 거리에 아무 데나 싼 똥덩이처럼 이리 밟히고 저리 밟히다 증발되어 버리고 말았는가.(같은 책, 148-150쪽)

위에 좀 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때 순식간에 그리스도인들과 또 교회 공동체가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붕괴되는 이 경험은 청년 안병무로 하여금, 제도적인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함께 일생을 순수한 평신도로 걸어가는 계기가 된다.

그는 마침내 교회가 유지되는 것은 교권과 경제력에 의한 조직이라는 사실과 성직자와 교권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데 장애물이라는 것을 몸으로 깨닫게 된다.

이것이 무슨 예수의 공동체냐! 예수는 그런 교회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와 민중들의 만남은 스스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어떤 권리도 그 위에 있지 않았다. 예수의 무리들이 피난을 떠난다고 가상하고, 그 교회에서 장만한 트럭을 결부시며 보라. 그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같은 책, 151쪽)

그는 이때 이미 제도적이고 교권중심적인 기성교회에 대한 강한 불만과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기존교회에 대한 불신, '예수 팔아 밥 먹는 것은 옳지 않다'는 순수한 신앙양심을 관철하려는 집념이 싹트게 되었다.
비로소 그는 곧 기존의 기독교를 떠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제도적 교회 안에서 교권에 기대여 안주하는 것이 예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그 때 알았고, 그 때 그 경험은 그가 후에 민중신학을 전개할 때, 제도적 교회를 넘어 민중 사건의 현장을 교회로 인식하는 신학적 체험의 자리가 된다.

일신교회에 사직을 하고 그는 생계를 위해 어머니 선천댁과 함께 떡을 만들어 팔기 위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어머니와 떡메를 친다. 그러면서 노동의 소중함과 즐거운 노동은 노예의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새 것을 창조하는 형태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미끈하게 꾸민 말로써 허상을 향해 마치 신의 대변자나 되듯 거들먹거렸던 삶의 모습과 제힘으로 땀을 흘리며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일을 하면서 새 생활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이 장면을 나는 내 의식 속에서 오래오래 간직했다.(같은 책, 154쪽)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참된 교회와 예수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안병무는 1951년에 옛 일신회 동지들과 다시 만나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을 생각하여 월간지 [야성](野聲)이라는 잡지를 낸다. 그리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반수도자적인 생활을 하는 공동체를 만들려고 시도했으나 이것도 역시 가족 이기주의로 실패하고 만다. 이런 실패를 거듭하는 안병무는 이루지 못한 공동체의 꿈만 안고 평신도에게 신학적 훈련능력을 강화한다는 취지에 동의하여 중앙신학교 창설에 가담한다. 그리고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안병무는 재미있게도 중앙신학교 교수로 재직한다. 그 후 비로소 그는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유학을 가 본격적인 신학공부를 하고 돌아와 신학자로 본래적인 자신의 자리를 잡아간다.

귀국 후, 중앙신학교 교장,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강사, 그리고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한다. 이런 신학적 훈련과 연구를 통해 그는 한국 그리스도인이 궁극적으로 걸어가야 할 '한국신학'이라는 보다 본질적인 신학을 추구하기 위해 1969에는 월간 [현존]을 창간하고, 1973년에는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한국신학을 발전시킨다. 그리고 신학 계간지 [신학사상]을 발행하여 서구, 특히 제3세계신학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주체적인 신학으로서 한국신학을 담아내는 신학지를 창간한다.

[야성]에서 [현존], 그리고 [신학사상]에 이르기까지 그의 문서출판 작업은 하나의 한국신학의 통로역할을 했으며, <한국신학연구소>를 개소시킴으로써 한국신학을 담아내고 촉발시키는 구실을 하게 된다. 그는 신학사상적 노력뿐만 아니라 한편으로 학자들이 소홀하기 쉬운 그 학문을 담아내고 발표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학문의 안과 밖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 온 것이다.
이렇게 한국신학의 외적인 자리와 틀을 만들어 놓은 안병무는 그 자신이 직접 한국신학 한가운데로 들어가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민족신학, 다시 말하면 민중신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4. 민중 발견과 민중신학의 태동

안병무는 독일에서 불트만의 실존주의신학을 연구했다. 그래서 유학 후에 신학교에서 그는 주로 불트만과 실존주의 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민중으로 사셨던 어머니 선천댁과 어린 시절 간도에서 자란 경험은 그의 신학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실존주의 신학에 몰두하였지만, 그것은 개인의 실존이 아니라 선천댁과 같은 민중의 실존이요, 강도 만난 민족의 실존이었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 차원이거나 인간내면적 차원의 실존이 아니고 사회정치적인 현실 속에서 어떻게 결단하고 참여할 것인가 하는 현재적 신학을 말한 것이다. 그는 이미 불트만을 넘어서고 있었으며, 한국의 역사 현실 속에 현재하시는 예수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신학적 눈은 이제 역사적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김성재 교수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970년부터 한신에서는 빈민지역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가서 현장실습을 했는데, 그때 안 선생님이 청계천 빈민지역에 왔다가 충격을 받으시고, 또 그해 11월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충격적인 민중경험이 민중신학의 단초가 되었다고 보는데....([신학사상] 1997 봄호)

그 때부터 안병무의 의식 속에는 민중의식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막연하게 그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던 민중이, 그의 뼈 속 깊이 스며들고, 다시 그의 몸으로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민중으로 살아왔던 어머니, 선천댁을 청계전 빈민지역에서 가난하고 헐벗은 민중 속에서 보았고, 마침내 주체적으로 인간임을 선언한 전태일에게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과 신학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은 1973년에 그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앙선언"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눌린 자와 약한 자와 가난한 자의 최후의 옹호자임을 믿는다. 또한 하느님은 역사에서 악한 세력을 심판하셨음을 믿는다. 우리는 주 예수가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선포하신 것을 믿는다. 메시아 왕국은 악한 세력을 꺾고 재산 없는 자와 거부당한 자와 짓밟힌 자의 안식처가 될 것임을 믿는다. 우리는 성령이 새로운 역사와 우주를 창조하며 또한 각 개인을 부활하고 성화할 것을 믿는다.(기독교교회협의회 자료집 1, 251-253쪽)

서구의 교회들이 "제2의 바르멘 선언"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이 선언은 유신체제하의 한국교회의 신앙고백이며, '한국적인 민중신학의 선언'이었다. 이 선언에서 우리는 한국 민중신학의 태동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선언을 계기로 간도에서의 일제시대와 6.25 경험, 온몸으로 살아온 안병무는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참여를 하게 된다. 반민주, 반인권을 자행하는 유신정권은 민족의 도려내야 할 썩은 부분이요, 새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연히 몰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민중의식을 고취시켜나갔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한가운데 자신의 몸을 투신했던 것이다.

1974년 죽재 서남동과 함께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서명한 이유로 안병무는 정부로부터 경고조치를 받는다. 이러한 민중신학자로서의 안병무는 민중현실 참여로 인한 현실적인 시련이 다가오고, 마침내 1995년에 이계준, 문동환 교수 등과 함께 국가안보를 위하여 면학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교수직에서 강제 해직되기에 이른다.

교수직에서 해임된 안병무는 1975년 8월 17일 한국 민중신학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경험하는데, 그것은 문동환, 서남동, 이문영 등 기독자해직교수와 그 구속자 가족들과 해고된 가자 등이 참여하여 창립한 '갈릴리교회의 설립'이다. 이 갈릴리교회는 '민중교회'의 효시가 됨과 동시에 기독교 민주화운동의 중심적인 장이 된다.

그후 1976년 3월 1일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이문명, 문동환, 서남동, 문익환, 이우정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일명 "명동사건"으로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 즉 민중선동에 의한 국가변란을 획책한 죄로 입건되어 1년여 동안 옥고를 치른다.

이 때 안병무 자신이 직접 몸으로 겪었던 고난과 억압의 민중체험은 감옥 안에서 고난받는 민중을 만남으로 동일시되었으며, 비로소 그는 민중을 발견하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고 민중을 개인 실존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민중을 이해하고 민중신학을 구체화하는 계기가 된다.

출감 후에 안병무는 기장선교교육원 원장으로 취임을 하고 6.25 이후 제도적 교회보다는 예수공동체에 대한 실현을 포기하지 못하고 1980년 개신교 수녀회인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를 설립한다. 그리고 일명 '서울의 봄'이라 할 수 있는 80년대 봄에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복직되지만, 그해 5월, 신군부에 의한 민중학살의 극치가 광주에서 일어나고 안병무는 8월에 교수직에서 강제로 해직된다. 그의 이러한 일련의 끝이지 않는 시련은 보다 구체적으로 민중신학을 실천할 수는 동기를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그의 민중신학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5. 민중과 예수

이제 안병무는 간도에서 어린 시절에 보고들은 독립군의 이야기와 6.25 전후로 경험하는 제도적 교회에 대한 회의, 그리고 지금 민중 한복판에 내몰리고 갇히고 짓밟힌 자신의 모습과 동일시하며, 또 언제나 민중 한가운데에서 온몸으로 살아오신 선천댁을 생각하며, 그의 가치관은 민중이 곧 민족사의 주체요 실체라는 민중중심의 역사관과 가치관으로 전환된다.

그가 감옥에서 만난 민중과 민족의 수난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민중으로 살아오신 어머니 선천댁을 통하여, 그는 민중은 민족사에서 철저하게 잊혀지고 무시되었으나 역사의 실체요 주체라는 사실을 체득한다. 그는 민중의 주체성, 자발성, 역동성과 역사성을 철저하게 믿고 경험했다. 민중은 선천댁처럼 스스로 역사를 이루어간다.

이 땅에 무수히 많은 선천댁, 그 민중은 개인 아니며, 또한 그들이 당하는 고난도 집단적 고난으로 인식된다. 절망적인 고난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목숨까지 바치는 자기초월의 사건이 민중들에게서 일어난다. 이 속에서 메시아적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서남동에게 있어서 성서는 오늘의 민중현실을 위한 전거에 불과했다. 그러나 안병무는 성서와 오늘의 민중현실이 분리되지 않는다. 민중현실의 눈으로 성서를 보고 성서의 눈으로 민중현실을 바라 본다. 서남동과는 달리 성서와 민중현실을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현실로 보는 사고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 속에 속해 있으며 역사를 객관화할 수 없듯이, 내가 나의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를 읽을 때에도 컨텍스트나 텍스트를 객관화할 수 없다.([민중신학이야기] 69쪽)

이처럼 '오클로스', 성서 속에 자리잡고 있던 이 오클로스는 지금 한반도 역사의 한가운데 민중이라는 집단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클로스는 규정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예수는 민중의 지배자, 수령이 되려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그들의 요청에 응했을 뿐이다.

오클로스는... 밖에서 규정할 수 없고 자신 안에 고유한 현실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는 저들을 규합하거나 또 어떤 가치를 가르치기 위해 능동적으로 저들에게 접근하지 않았고 오직 저들의 요청에 응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수동 내지 그들과의 일치의 입장에 섰지, 저들의 지배자. 랍비, 또는 수령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가 오클로스와 斷·續의 관계로 서술된 것에서 본다.([민중과 한국신학], 103쪽)

이처럼 안병무는 예수와 민중을 역동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있으며, 민중과 예수를 동일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자 예수와 피구원자 사이를 구분 짓지 않고 민중과 예수를 동일시함으로 민중구원론을 창출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에게 있어서 이제 민중신학은 민중을 증언하는 것이요, 민중사건이 곧 신학인 것이다. 신학자의 말, 신학자의 언어, 교권과 제도적 교회 안에 감금되어 있는 예수를 민중 속으로, 삶 한가운데로 성육신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예수는 개념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교리와 교권에 갇혀있는 예수가 아니라 민중 속에서 만나는 민중예수, 그 민중예수가 구원의 주체자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이미 교권이나 성직이 없었듯이, 그에게 이미 우상이 자리잡고 있지 않듯이 예수도 교조적인 우상이나 신적 존재가 아니라 민중집단 속으로 들어와 민중이 되신 예수, 바로 그 살아서 꿈틀거리는 역사의 주체자로서의 민중예수가 자연스레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안병무에게 있어 제도적인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질서가 잡히고 계층이 있는 제도적인 교회는 예수공동체가 아니다. 예수와 오늘의 민중현실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교권과 교리요 제도적 교회요, 성직이라고 비판한다. 예수사건은 오늘의 교회에서 일어나지 않고 민중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가 성서신학자로서 성서 안에서 발견한 예수는 이미 민중현장 속에 살아 있었다. 문자로 설명될 수 없고, 문자에 갇혀있을 수 없는 민중, 그 민중을 비로소 감옥 안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민중은 개인이 아니다. 민중은 사회적 전기요, 거대한 생명력이며,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명체이다.


6. 민중, 생명의 화산맥

안병무는 90년대에 들어와 민중신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그는 이전에 이미 [살림]지를 창간하고 "죽임의 세상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민중공동체를 꿈꾸며 살림운동, 곧 생명운동을 제창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 통일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에 대한 관심과 그 신학적 노력이 끊이지 않았다.

이 시기에 안병무에게 나타나는 이 모든 새로운 시도들은 민중에게서 나타나는 생명성으로 집약된다. 90년대에 들어와서 혼란스런 시국 가운데 젊은이들의 분신기도 사건들이 줄을 잇고, 또한 점점 심각한 상태로 몰아가는 자연 생태계의 파괴, 남북분단의 고착화, 이 모든 것을 '민중생명'이라는 보다 근원적이고 실제적인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생명은 생명체를 형성함으로써 각 개체들이 생존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투쟁과 희생, 다른 한편 뒷받침과 협조를 하면서 공존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체계를 깊이 생각하면 미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어느 하나도 생명체라는 큰 테두리 안에 그 위치가 있습니다.([살림] 1990년 8월호, 12쪽)

역사적 실체로서의 민중에 대한 관심이 이제 근원적인 실체인 생명에로 전이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중을 생명의 근원으로 보고 예수 사건을 민중생명운동으로 볼게 된다. 그는 이제 '예수만'을 '생명'만으로 바꾸어 가질 수 있다고 보는데 까지 이른다. 이것은 놀라운 사상적 전환이다. 그는 말하기를 민중신학이 할 일이란 민중이야말로 역사를 생명의 본원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민중생명신학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은 동양적 사고의 배척인데, 나는 요새 한 경험에서 계속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동양의 기(氣)에 대한 것입니다. 성서의 언어로는 구약의 '루아하'(숨, 기운), 신약의 '프뉴마'(영)와 연결되겠지만 보편적인 언어를 쓰면 역시 '생명'이라는 것은 운동이예요. 나는 세계가 옛부터 생명의 실체를 부단히 찾아 왔다고 보는데, 그리스도교에서는 그것을 하느님이라고 불렀지요. 동양에서는 도(道)라고 하지요. 나는 역사 속에서 그 생명이 모든 것을 뚫고 참 생명답고 순수하게 드러난 것이 예수사건이라고 봅니다. 예수는 투쟁하고 죽으면서 생명의 본질을 우리에게 표출시킨 분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놀랍게도 생명의 시각을 등한히 여겨요. 생명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고 대충 넘어가고 맙니다. 생명자체는 모든 도전과 싸우면서 자기를 계속 살려 나가는 것, 체념하면 죽고 싸우는 한에 있어서 사는 가장 순수한 것, 가짐으로써 있는 것이 아니고 생명 그 자체를 신이라는 말로 나타낼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한 가장 순수한 생명을 지닌 것이 민중입니다.(기사연 무크지 2, [민중의 생명을 위한 민중신학] 447-8쪽)

이상의 그의 말속에 민중생명신학의 실체가 드러난다. 하느님의 영은 곧 '생명의 영'으로 바뀌어 표현되고, 예수 사건은 생명이 생명답게 드러난 것이고 예수는 생명의 본질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순수한 생명을 지닌 것이 민중이라는 것이다. 그로써 민중신학과 지식층은 반생명적 악조건과의 싸움에 가담하며, 그 악조건 속에서 자신마저 잃어버릴 위기에 있는 민중이 체념에서 다시 일어나는 생명의 투쟁에 가담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민중을 생명의 근원으로 보는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생명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움직이는 민중을 말했다면, 이제 논하는 생명의 신학은 민중의 뿌리 찾는 작업이므로 결국 같은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고대 고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동양사상적 방법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조선의 역사, 민중의 역사, 그 거대한 산맥을 타고 솟아나는 민중의 힘, 바로 민중은 생명의 화산맥인 것이다. 역사 한가운데에서 솟아나는 민중의 용암들, 민중의 함성, 그것은 곧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이요, 생명의 시작이며 뿌리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작업은 구상만 있었지 더 진척되지 못하였다. 그의 동양신학적 민중생명신학이 구체화되고 전개되어 갔다면, 한국 민중신학이 보다 더 깊고 튼 지평 속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될 것이지만, 여기에서 멈춘 것이 아쉽다. 결국 이 작업은 후학들에게 남겨졌고. 그의 민중신학에 대한 발걸음도 더디 옮겨가기 시작했다.


7. 한국신학의 터를 다져 놓고 떠나시다.

그는 이제 학문적 작업보다는 다가올 미래에 후학들이 민중신학을 더욱 발전시키고 미래의 신학, 세계의 신학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신학 외적인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1992년 9월 '한국민중신학회'를 창립하여 회장에 취임하고 흩어져 있던 민중신학자들과 세대 구분 없이 한데 힘을 모아 새로운 민중신학의 미래를 개척해 갈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한국 민중신학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의 자리매김을 위해 1994년 천안에 있는 '한국신학연구소'를 민중신학공동체로 탈바꿈시키고 재단법인 <아우내> 이사장에 취임한다.

이렇게 그는 한국 민중신학의 초석을 다져 놓기에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이 세계신학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움직이고, 또한 신학 변혁의 꿈을 한국 민중신학을 통해서 실현되리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21세기 한국신학의 미래를 위해 그는 노구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중신학의 터를 다져 놓고, 후학들로 하여금 자신이 못다 이룬 예수공동체, 민중공동체를 실현해 줄 것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민중신학의 외적인 터다지기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땅의 교회와 신학, 그리고 후학들을 위해 자신을 해야할 한국신학 터다지기를 다 해 놓았다고 생각해서 일까, 그는 너무나 갑자기 지난 1996년 10월에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 가셨다. 그는 영원한 민중이셨던 선천댁 어머니 품으로 돌아 가셨다.

그가 이 땅에 와서 한국신학계에 남긴 업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학자로서, 사회운동가로서, 교육가로서 그가 이루어 놓은 업적 보다 문자의 세계, 학문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가난한 민중과 함께 하셨던 예수를 따라 살다가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한국신학계와 그 후학들을 위해 길을 닦아주고, 터를 다져 주고, 그래서 그의 온 생명을 한국 민중신학이라는 터 묻히고 돌아 가셨다.
 

지난 초여름 어느 날이었습니다. 신학교 동기생이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10여 년이 넘게 된 만남이라 반가웠고 또 한편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궁금함도 많았습니다. 저녁 8시부터의 만남은 자정을 넘어 1시쯤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거의 일방적이다 싶은 친구의 얘기를 들어 주고 들어 주다 못해 드디어 조금은 짜증이 난 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삶을 문제로 보고 사는 이들이 태반입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매일 그 문제를 푸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너는 어떻게 된 것이 다 문제투성이냐. 정치도 문제고 경제도 문제고 신학교도 문제고 교회도 문제고 가정도 문제고 ...어떻게 너는 문제집만 쌓아 놓고 사니? 해답집은 하나도 없이 말야!"
"형,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지 않니? 우리가 지금 4시간이 넘게 얘기를 했는데,
너는 다 문제로만 보고 있지 않니. 이 말 잘 들어 봐. 문제는 없는 거야. 문제가 있다면 네가 그런 것들을 문제라고 보는 그 눈이 문제지."

남편도 문제고 자식도 문제입니다. 자녀가 공부를 잘 해도 문제고 못해도 문제입니다. 교회가 작아도 문제고 커도 문제입니다. 사업이 안되어서 문제고 잘되어도 문제입니다. 국민소득 1만 불이 넘으면 문제가 없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300불 때보다 문제는 더 쌓이고 쌓입니다. 문제는 없어지기는 커녕 갈수록 새롭게 생기는 것이 인생사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누가 문제로 내주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로 내준 사람도 없는데 그런 것들을 문제로 알고 끙끙대며 풀고 있으니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요. TV나 언론에서 문제로 보면 모두가 그 바람에 휩쓸려 문제라고 합니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애벌레에게는 앞에 있는 것들이 다 문제입니다. 앞에 있는 돌덩이도 문제고 냇가도 문제고 막대기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비에게는 그런 것들은 구경거리가 됩니다. 애벌레가 막대기를 치우고 돌을 치워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의 삶이 인간의 의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삶의 형태라면,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로 살아가려는 신앙하는 삶인 영성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애벌레가 막대기를 치우고 돌을 치우고 냇가에 다리를 놓고 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식으로는 인간 구원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바로 애벌레가 변하여 나비가 되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없어지고 오히려 그런 문제나 장애가 구경거리고 은총이 된다는 이 거듭남의 신비,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영생하는 삶의 방법입니다.

산행을 하려 했는데 비가 와서 망쳤다고 합니다. 날씨는 충실히 자기 일을 했는데 날씨가 자기 기분을 망쳤다는 것입니다. 잘 살펴보십시오. 망친 것은 날씨가 아닙니다. 망치고 상한 것은 자기 마음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날씨를 어떻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자기를 망쳤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나 날씨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어떻게 해보려는 삶의 태도로 세상사를 보니 다 문제로 보이는 거겠지요.

그런데 이런 부정적 감정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습니다. 비가 와서 산행을 망쳤는데 누구 기분이 나쁜 것입니까? 비입니까? 나입니까? 우리는 그 동안 이런 공부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탐구를 해보지 않았습니다. 비가 와서 내 기분이 상해 있는 동안 어떤 사람은 그 비를 맞으면서 연인과 사랑을 속삭였을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더구나 가뭄에 시달리던 채소들이 그 단비에 목마름을 해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그 비를 탓하고 원망하고 그 비가 산행을 망쳤다 합니다. 이런 식으로 탓하고 원망하는, 한 번도 검증되지 않은 유치한 원리들, 그 삶의 방법을 따라 살고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우리 믿는 자들도 그리스도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여, 주여는 녹음기도 할 수 있고 앵무새도 할 수 있습니다. 깨어나십시오! 지금 누구를 원망하거나 그 무엇을 탓하고 있다면 그것은 환상을 갖고 자기 환상에 현실이 맞추어지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것입니다. 어린애 짓이지요. 살았으나 죽은 삶입니다.

기차표를 사려고 줄을 지어 서 있는데 누군가가 새치기를 합니다. 그때 화가 나고 마음이 상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새치기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규칙대로 줄을 잘 서 있는 사람입니까? 잘못한 사람은 괜찮은데 줄 잘 서고 기다리는 사람이 왜 화가 날까요? 이것 참 묘하지 않습니까?

깨어난다는 것은 내 안에 이미 형성된 그런 조건들을, 규정들을, 틀들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떠남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가르침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동안 형성된 자기 틀, 규정, 사고방식, 라이프 스타일을 떠나 그분께서 지시하는 대로 새롭게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형성된 조건들을 알아차리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면 거기에서 저절로 변화는 일어납니다. 내가 변하고 싶어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변화는 에고의 장난입니다. 변화는 저절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더럽다느니 깨끗하다느니, 좋다느니 싫다느니 하는 등의 부호가 떨어져 나가고 똥이 똥으로, 밥이 밥으로 보이는 순간,바로 그 순간 속에 영생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삶은 느끼고 즐겨야 할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삶을 신비로 보는 눈이 열릴 때에 비로소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지 사실 있음 그대로를 보지 않습니다. 사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구원이요, 사랑은 거기서 시작이 되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그분께서 생사 화복을 주장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싫다고 하고, 내 마음에 든다고 좋다고 하는 것은 아직 그분을 주님으로 믿지 않고 있다는 스스로의 의심을 탄로내는 것이지요.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관념이나 생각이 아닙니다. 또한 그런 느낌만도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그런 사실의 세계를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제게는 잊을 만하면 꾸는 꿈이 있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때 고생했던 원뿔 면적을 내는 문제를 만납니다. 그러면 애를 태우고 어떤 때는 땀을 흘리고, 친구 시험지도 훔쳐보는 꿈입니다. 그 문제를 풀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꿈입니다. 안절부절하다 깨어 보면 그것은 꿈일 뿐이었습니다. 깨어나보니 풀 문제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깨어나지 않은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는 한 성현의 말을 다시금 상기해 봅니다. 사람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이셨습니다. 깨어나야 한다는 말씀이십니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삶은 느끼고 즐겨야 할 신비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는 것 바로 신앙의 신비요 영성의 길입니다.
<전원교회 목사 . 영성수련원 원장>

"I have a dream that one day this nation will rise up and live up to the true meaning of its creed: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 I have a dream that one day on the red hills of Georgia, the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 owners will be able to sit down together at a table of brotherhood."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n the state of Mississippi, a desert state, full of the heat injustice and oppression, will be transformed into an oasis of freedom and justice."

"I have a dream that my four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I have a dream that one day the state of Alabama will be transformed into a situation where little black boys and black girls will be able to join hands with little white boys and white girls and walk together as sisters and brothers..."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Q 나이 서른이나 됐는데, 뭘 하고 싶은지 뭘 잘하는지 모르겠어요

엄마에게 착한 딸, 동생들에게 멋진 언니가 되도록 웬만한 학벌과 직업 가지고 때 되면 결혼하고 아이 생기면 들어앉아 남편이 벌어오는 돈에 기대 살림하고 살아야 하나. 아니면 적성과 꿈을 찾아 나이나 주변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돈이나 내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아야 하나. 대학과 대학원 졸업하고 연구원으로 벤처기업에서 일한 지 1년8개월. 고등학교 때는 공대가 나랑 잘 맞는 줄 알았고, 또 한창 잘나가는 분야이기도 해 성공하고 돈 벌고 싶어 이쪽으로 왔다. 그렇게 대학원에 들어갔지만 ‘이 길은 내 길이 아니구나’ 깨닫고도 이왕 시작한 거 본전은 뽑잔 심산으로 취업해 2년 버티고 그 담에 생각하자 했는데 슬슬 그 시기가 다가오니 일도 싫고 회사에 매일 나오는 것도 답답하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 박혀 있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때려치우자니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내가 뭘 잘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성격상 무작정 때려치우면 방콕폐인이 될 게 뻔하고.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A 0. 그거 아나. 당신 같은 사람 우리나라에 참, 많다. 나이 서른에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도 뭘 잘하는지도 모르겠단 사람들, 부지기수다. 사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단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젠 자신이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모른다는 거다. 당신 진로를 대신 택해 줄 재준 없다. 하지만 후자의 문제라면, 지금부터 뭘 고민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있겠다. 오늘은 그 이야길 해보자.


1. 지난 아테네 올림픽 때다. 우리 리포터가 풍물취재로 한 어부를 인터뷰했다. 잡은 생선 중 크고 좋은 놈들 따로 놓는 걸 보고 리포터는 당연하다는 듯 이쪽 상등품은 팔 거냐고 묻자, 어부는 무슨 소리냔 표정으로 먹을 거란다. 왜 값을 더 쳐줄 물건을 팔지 않냐 하자 나머지 판 돈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단다. 좋은 놈들은 와이프랑 먹을 거란다. 행복관이 판이한 게다. 이런 어부, 우리나라엔 없다. 왜. 우린 그렇게 배우질 않는다. 스웨덴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인간은 소유욕과 존재욕구를 가지는데 소유욕은 경제적 욕망을, 존재 욕구는 인간과 인간이,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의지를 뜻한다고. 그런데 그 존재 욕구를 희생해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건 병적 사회라고. 공교육이 처음 가르치는 게 그런 거다. 사회 시스템 역시 그 가치관에 기초해 구축되고.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건 그렇게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그 기본 태도에 관한 입장이어야 한다. 우린 그런 거 안 배운다. 대신 성공은 곧 돈이라는 거. 돈 없으면 무시당한다는 거. 그 경쟁에서의 낙오는 인생 실패를 의미한단 거. 그렇게 경제논리로 일관된 협박과 회유로 훈육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초식동물처럼 산다. 초식동물의 군집은 가장 뒤처지는 놈이 포식자의 먹이가 되어 나머지의 안전이 잠정 담보되는 시스템이다. 거기 공적 신뢰 따윈 없다. 결국 끝줄에 서지 않으려 끊임없이 서로를 경계하며 두리번거리는 왜소하고 불안한 낱개들만 남을 뿐.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시도할 겨를도 없고 엄두도 안 날밖에. 우리네 평균적 삶이 그렇다. 여기까진 위로다. 갈피를 못 잡는 건 당신만이 아니란 거다.


2. 그러니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건지는 스스로 깨치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게 자신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인간인지부터 아는 거다. 언제 기쁘고 언제 슬픈지. 무엇에 감동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 뭘 견딜 수 있고 뭘 견딜 수 없는지. 세상의 규범에 어디까지 장단 맞춰줄 의사가 있고 어디서부턴 콧방귀도 안 뀔 건지. 그렇게 자신의 등고선과 임계점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윤곽과 경계가 파악된 자신 중, 추하고 못나고 인정하기 싫은 부분까지, 나의 일부로,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전혀 멋지지 않은 나도 방어기제의 필터링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되는 지점, 그런 지점을 지나게 되면 이제 한 마리 동물로서 자신이 생겨먹은 대로의 경향성, 그런 경향성의 지도가 만들어진다.


거기서부턴 더이상 자신에 대해 관심이 없어진다. 더이상 자기합리화나 삶에 대한 하찮은 변명 따위에 에너지 소모하는 일, 없어진단 이야기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든 에너지는 생겨먹은 대로의 나를 세상 속에서 구현하는 것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더이상 눈치 보거나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 다음부턴 쉽다. 꿈이니 야망이니 거창한 단어에 주눅 들거나 현혹되거나 지배당하지 말고, 그저 자신이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 가보고 싶은 곳들, 만나보고 싶은 자들 따위 리스트를 만들라. 그리고 그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라. 사람이 왜 사느냐. 그 리스트를 지워가며 삶의 코너 코너에서 닥쳐오는 놀라움과 즐거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만끽하려 산다. 최소한 나는 그렇다. 건투를 빈다.


 
»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가장 깊은 의미에서 감사란 삶을 고맙게 받아야 할 선물로 산다는 뜻이다.

진정한 감사는 좋은 것과 나쁜 것, 기쁜 일과 아픈 일, 거룩한 부분과 거룩하지 않은 부분을

가리지 않고 삶 전체를 끌어안는다. 우리가 삶 전체를 끌어안는 까닭은 모든 사건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기 때문이다.

힘든 시간이 곹 하나님을 만날때라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삶의 모든 부분에서 마음을 열 수 있다.

감사한다는 것은 기억 속에 있는 상처를 억누른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그 상처를 가지고 피상적이 아니라 정직하게 나아갈 때,

인생을 바꾸는 일이 서서히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째서 우리를 치유로 부르시는지를 알게 된다.

슬픔과 복을 한데 얶어 기쁨의 스텝을 내딛는 것이 곧 찬미의 춤임을 깨닫는다.

-'춤추시는 하나님' 중

인도 사람들은 사람에게 제일 어려운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 첫째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윤회설을 믿기에 영원히 돌아가는 윤회 속에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몇 천년, 아니 몇만 겁에 한번 얻은 기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네들은 자살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람으로 한번 태어나기가 얼마나 힘든데 자살해서 그것을 허비하느냐는 것이지요.

 이들이 그러한데 지금을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지 돌아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정말 고맙게 소중하게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내가 하필이면 이런 때에, 이렇게 태어나서 이런 고생을 하느냐며 신세타령과 원망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낳아준 부모를 원망하고, 내 외모, 내 성격, 내가 가지고 있는 질병을 탓하면서 소중한 시간, 절호의 찬스를 낭비하고 있지 않은지요.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천우신조의 기회, 하늘의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뜻이 있어 온 세상입니다.
피조물 중에 사람만이 내면의 세계가 있고 그것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내면의 세계는 모른채 곤충이나 동물들처럼 바깥세계만 살다가 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로만 살다고 진정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죽음에 삼키운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이 두신 신성, 하늘의 빛이 있는데 말입니다.
성경 창세기는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인지 알고, 그 형상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다음으로 어려운 것이 스승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눈을 가지는 것도 어렵지만 그런 마음의 눈을 얻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더 어렵다는 거지요.
우리는 생에 예수님을 알고 그 사랑을 만나 하나님을 만나는 길, 방법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지요.
믿음은 그 세계를 여는 통로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부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바울을 만나야 하고, 루터를 만나야 하고, 웨슬레를 만나야 하고, 목사를 만나야 합니다.
나에게 그런 빛을 전해주는 스승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길이 없습니다.
성경은 또 이것을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겠느냐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아니, 다른 말로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통로, 선생님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우리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를 통해, ‘그 일’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사람에게 이미 보여주셨다고 하셨지요.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나 또 하나님을 알고 만나뵙고 있으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요.
또 우리는 그런 감사와 기쁨, 감격으로 살아 우리의 삶을 가장 멋진 하늘의 작품으로 가꾸어가는 삶의 예술가들입니다.

그 복음을 기억하고 깨어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10월 첫째주일 캐나다의 추수감사절입니다.
180톤짜리 작은 배 메이플라워를 타고 65일 만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102명의 청교도들이 그 해 추위와 굶주림으로 44명이 죽고 겨우 옥수수 농사를 거두고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음식을 마련하여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하지요.
어찌 그런 상황에서 감사가 나올 수 있을까요?
꿈을 찾아 떠나온 길, 그것도 신앙의 자유를 위해 험한 길도 마다 않았는데, 한 가족의 절반을 고통 속에서 떠나 보내고도 겨우 옥수수 몇개를 놓고도 감사를 드릴 수 있었다니 헤아리기 쉽지 않은 신비입니다.

뭐가 그리 감사할까요?
그런데 시편 100편에도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와 찬송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범사에,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긴 잠에서 깨어 본 사람,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는 사람은 죽어도 좋다고 말합니다.
어떤 상황도 나를 어쩔 수 없음을,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사실은 내가 원한 일이고 내게 필요한 은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감사할 수밖에요.

저는 아내의 백혈병과 같이 추수감사절을 만나고 있습니다.
얼마전 한국으로부터 다 큰 아들 내외에게 보내신 '오직 기도'라는 아버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인내해서 욥과 같이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만나서 정금같이 달련되어 더 귀하게 쓰임받는 목사로 세워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하고 있다.
부모로서 아무것도 할수 있는 일이 없으니 마음 아프다.
생각할 수도 없는 일를 당하고 보니 부모로서 잘못한 일만 생각나는구나.
유학할 수 있게 뒷받침 못한 일들,
몸과 마음 고생이 너무 많아서 생긴 일들,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자신을 돌볼수 없이 고생하다가 당한 일들이라고 생각하면
목이 메이고 눈물이 마르지 않고
병상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와 옆에서 함께 고통받고 있는 **이를 생각하면 너무 마음 아프구나.
.
.

혈루병을 고쳐주신 주님 사랑하는 **이를 고쳐주옵소서.
38년된 병을 고치신 주님 사랑하는 **이를 고쳐주옵소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를 살리신 주님 사랑하는 **이를 살려주옵소서.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 사랑하는 **이를 살려주옵소서.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고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신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를 꼭 고쳐주옵소서 라고 쉬지 않고 기도 하고 있다.
.

이렇게 다 장성해서도 걱정과 근심만 끼쳐드리는 불효만 드리고 있습니다.
말씀처럼 이런 일을 만나고 보면 떠오르는 일은 자꾸만 잘못한 일밖에요.
미안한 일밖에요.
저도 그런데 멀리서 지켜보실 수밖에 없는 아들 내외를 보시는 아버님 마음이야 어떠시겠습니까?
그런 메일을 받고 올리는 며느리의 편지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이에요.
병원에서 인터넷을 쓰게 되었네요.
저 때문에 마음아파 하지 마세요.
제게 찾아온 병은 하나님의 고난도 아니고,
제가 어떤 죄를 지어서도 아니고,
주변의 누가 잘못을 해서도 아니랍니다.

나면서 부터 병자를 보고 사람들이 묻지요.
부모의 죄냐?
본인의 죄냐?
예수는 말합니다.
부모도 본인의 죄도 아니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드러낼 것이라고요.

저는 고생해서 생긴 병도 아니고,
몸 관리를 잘 못해서 생긴 병도 아니고,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병도 아니랍니다.
생활 습관에서 온 것도 물론 아니구요.

갑자스런 병의 방문에 놀라시겠지만 로또가 당첨되어 찾아오면 반기듯이 저는 이 백혈병도 반기고 있습니다.
뭔가 저에게 들려줄 이야기, 가르쳐줄 진리가 있어서 잠시 방문한게지요.
불치병도 아니고
치료도 가능하니 아무 염려 마시고
평안히들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저 소식이 있어서 찾아온 병에게 잘 귀 기울이고 여러가지 배워 가고 있답니다
하루하루 병상 생활에 잘 적응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염려마세요.
옆에서 남편이 제가 하던 일까지 하느라고 고생이 많지만, 이 또한 남편이 만나가야 할 새로운 일 일겁니다.
아이들, 가족들과 더 가까이 만나면서 행복해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럼...
어머니도 안심시키시고, 간구보다는 감사로 평안을 누리세요.
저는 지금 최상의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사랑해요.
아버님.

그래요.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더 기도하고, 더 깊어지고, 더 고요해지고, 더 많이 표현하고 사랑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평생을 만나도 만나지 못할 서로의 삶이 만나지니 가장 큰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말부터 열흘간의 예가 록키 여행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열흘간 원없이 태고의 신비가 그대로 남아 있는 깊은 록키 산맥에 들었다 나온 것만으로도 그러한데, 여행 시작부터 불거진 에피소드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이 산과 같습니다.

열세명이 열흘간 야영을 할 차비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큰 일이었습니다.
꼼꼼히 목록을 작성하고 몇번씩 점검해서 준비를 마치고 여행을 시작했는데 첫날 저녁 야영장에서 텐트를 치면서 큰 짐 두개를 토론토 공항에 두고 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텐트와 취사도구는 있었지만, 개스와 식량, 침낭 몇개와 메트리스들이 오지 않았던 것이지요.
캘거리 공항에서 7인승 미니밴을 두 대를 빌렸는데, 그 중 한대가 열흘 내내 시동이 잘 걸리지 않고 '채크 엔진'에 점검등이 계속 들어와서 불안했습니다.
메인 카메라 충전기를 야영장에 남겨두고 철수를 하지 않나, 자동차 키를 차 안에 두고 문이 잠기지 않나....
여행에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 록키 여행 내내 우리를 따라다녔더랬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 여행 길이 더 활기차고 인상 깊고 소중하고 의미있게 되었다는 것은 지나 보아야 알 수 있는 비밀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길이 있다고 하지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되어져야 할 일만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교만일뿐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기 시작하면 다툼과 혼란밖에 없습니다.
일의 시작은 주어진 상황과 처지에서부터 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다 선물인 것이지요.
내 생각에 옳고 그름은 내 생각 안의 세계일뿐입니다.
내 생각에 그른 것도 옳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겸허이고, 신앙의 언어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우리를 맡겨 드리고 내어 놓음입니다.

가방을 공항에 두고 와서 우리는 편안하고 안락한 캠핑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선물을 감사로 받지 못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거저 주어진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를 알아차려갈 수 있었습니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차에 시동이 잘 걸렸다면 일사천리의 여행을 할 수 있었겠지만 시동이 걸리지 않던 차에 시동이 걸려서 무사히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을 때 우리 안에 일었던 환호성과 안도, 감사는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긴장과 감사를 놓치지 말고 살라는 것이지요.
사실은 자연으로, 저절로 되는 것은 없지요.
다 기적인 삶입니다.
또 우리는 배터리 팩을 야영장에 두고 철수하고, 차에 시동이 걸린채 차문이 잠겨서 차밖에서 옴짝달싹을 할 수 없어서 감히 예상할 수 없었던 멋진 일정의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정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오하라 호수에서 야간산행을 즐기며 일박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저 한낮에 오하라 호수를 둘러보고 호수 아래 산장에 묶을 수밖에 없었을테니 말입니다.

그렇게 여행을 하면서 우리들은 내내 이번에는 '뭐 두고 온 게 없나?'하면서 꼭 뒤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서로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고 왔으면 두고온 이유가 있겠지....."
다 까닭이 있습니다.
당장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서 답답하고 불안하고 두려울 뿐이었지요.

열흘간의 여행도 그러한데 우리들의 삶이 그렇지 않을까요?
내게 일어나는 일, 내가 경험하는 불안... 다 이유가 있는 일입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납치된 분당 샘물교회의 단기선교팀의 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목놓아 기도하지만 지금 필요한 일이 일어났고 그것을 통해 주시는 음성과 선물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겠지요.
 
캐나다 토론토의 깊은산으로 부터

바울은 '처음부터,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구별하여 세우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터무니 없는 과장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아니 나는 이것은 한 사람의 깊은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고, 지금까지의 지나온 역사에도 없고 미래에 올 역사에도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전 피조물 중에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나의 환경, 나의 경험, 나의 생김새에 꼭 맞는 그런 일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창조이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발견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할 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시는 그 일은 아주 독특한 일입니다. 내가 안하면 누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꼭 유일한 인생인 나에게 맞추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쉽고 편한 쪽을 택했고 그 부르시는 소리에 배반했습니다.

제 몸에 신나를 붓고 뛰어나와 노동해방을 외쳤던, 가장 험난한 십자가의 길을 택했던 전태일은 역사의 순리속에서 산화하지 않았습니다. 조건이 무르익어서가 아닙니다. 아무고 그를 주목해 보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에게 눈길하나 주지 않는 암담한 현실 때문에 그는 그의 몸을 바쳐 정면 돌파를 시도한 것입니다. 전태일이 자살한 것을 기독교인들이 나무라기를 좋아하는데 전태일은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무관심이 그를 불태우고, 우리의 이기주의가 그의 목줄을 조인 것입니다. 그는 마치 예수와 같이 자기의 몸을 부숴 역사의 수레 바퀴를 돌려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밥이 없어 굶기를 밥먹들이하는 여직공들을 보고 그는 자기가 버스타고 갈 차비로 풀빵을 사서 나눠주고 자기는 하루 종일을 걸려서 걸어다니곤 했습니다. 수 많은 꽃다운 청춘들이 병들어 사라지는 현실을 대하며 그가 근로기준법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어느 천국의 법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 8시간 근로, 근로조건 등 교육받지 못한 노동자의 손으로 직접 법대로 해 줄 것을 탄원하는 탄원서를 써서 그는 노동부, 법무부로 구청, 시청으로 뛰어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교육 이외에 학교교육을 변변이 받지못한 그가 이런 일들을 처리하면서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가 간절히 소원한 것이 있었습니다. '내게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으면..'하는 것입니다. 그는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은 소위 지성인들입니다. 역사에 대한 비젼도 있고, 전태일의 몇 십배의 지식을 갖고, 앞선 의식을 가진 사람들 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가 역사에 끼친 몫의 10배, 100배 몫을 해야 정상인데... 우리의 몫을 다 합쳐도 전태일 하나가 한 몫을 감당치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더 많은 공부, 더 많은 깨달음,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머리가 터질 만큼 위리의 가슴이 벅찰 만큼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선택입니다. 내 안에 예수, 지금 그분이 무슨 사건,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가 문제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태일의 사랑과 결단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류하는제자들을 뿌리치고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 결단말입니다.

삼십년전 전태일, 이천년전 예수님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 안에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가 내 생활 속에, 나의 삶의 중요한 부분 속에 있어야 하고 나의 삶을 통해 그분의 얼굴이 그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가 중요합니다.  

 

준비 없는 희망

준비 없는 희망이 있습니다

처절한 정진으로 자기를 갈고 닦아

저 거대한 새벽을 기어코 뛰어넘을

진정한 자기실력을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 없는 준비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해가는데

세상과 자기를 머릿속에 고정시켜

현실 없는 준비에만 몰두하는 자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