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B가 아니었더라면?

만약 민주당이 집권하였으며 현재와 같은 쇠고기 문제가 사라졌을까요?

만약 MB가 30개월미만 쇠고기수입을 단행했더라도 이러한 반대가 없었을까요?

저는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의 강도 차이가 있더라도 현재와 유사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물론 MB가 기대이하로 죽을 쑤고 있고 CEO형 리더십의 한계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렇지만 제 개인적으로 MB가 대통령이냐 아니냐 만큼이나 고민해볼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2) 누가 싼 똥일까?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경제학적으로 행복이란 후생(welfare)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소비자의 입장에서 소비자잉여

(consumer's surplus)라고 합니다. 이놈의 정의는 쉽게 얘기하면 더 싼 값에 더 많이 소비함으로써 느끼는

만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쉽게 얘기하면 보다 적은 댓가를 치루면서 더 많이 갖을때 사람들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까지 이 방향을 향해 열심히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나름 큰 성과를 달성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한 삶을 우리는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더 싼 값에 더 많이 소비하고 싶은 욕망은 무한대인데 그 욕망을 채울 자원에 한계가 다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욕망을 꺾지 못하기에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무리수들이 두어지고 있습니다.

항생제를 잔득 먹인 새우덕분에 예전보다 손쉽게 새우를 먹을 수 있습니다. 가로, 세로 30cm의 우리

3마리씩 부리가 잘려진채 가두어진 닭사육 덕분에 싼 값에 닭을 먹을 수 있습니다. 8개의 생니와 꼬리가 짤린채

평생 가로 1.8m, 세로 0.65m의 콘크리트 철창에서 사료만 먹인 돼지사육 덕분에 싼 값에 돼지를 먹을 수 있습니

다. 10살 미만의 제3세계 아이들의 노동착취를 통해서 우리는 더 싼 값에 축구공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무리수를 두다보니 육골분 사료를 먹인 소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무리수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육골분 사료가 광우병을 일으키고, 과도한 곡물가격

상승으로 좀 더 높은 식량생산성을 위해 유전자 조작 농산물들이 개발되고 유통되고 있습니다. 그 안정성에 관해

서는 아직 잘 모릅니다. 과도한 에너지의 사용으로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환경이 오염되고 우리는 더 많

은 질병의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3) 누구도 댓가를 치루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무한한 욕망을 위해서 무리수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갖으려 하지만 그 부작

용은 회피하려고 합니다. MB를 지지했다는 것은 한미 FTA를 통해 보다 많은 욕망을 누려보겠다는 것 아니겠습

니까?  MB는 그것을 위해 쇠고기 개방이란 너무 과감한 댓가를 치뤘습니다. 사람들은 그 댓가가 너무 커서 당황

한 것이지요. 앞으로 이 무리수 때문에 우리 사회는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쇠고기 사태와 유사한 논란에 휩싸일

것입니다.

저는 이 물질적 욕망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은 그 욕망을 채우는데 한계에 도달해

보입니다. 결국 이 욕망을 자제하느냐, 무리수를 두느냐라는 선택과 이에 대한 고민들이 필요하단 생각을

해봅니다.


(4) 회개할 대상이 MB만은 아니다.

저는 지금 MB에게 돌을 던지는 것에 찬성합니다. 그렇지만 돌만 던져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만난 쇠고기 문제는

누가 지도자인가가 문제의 강도를 결정했다면 우리 삶의 패턴이라는 구조가 문제 자체를 야기한 것은 아닌가 생

각됩니다. 또한 우리의 무한한 욕망이 그런 지도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도 일정 정도 공범이라는 것, 우리가 

맞을 돌들이 있습니다. 그 돌들을 맞아야 합니다.

여전히 저도 편한 것, 좋은 것, 많은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ㅠㅠ

1. 나는 누구인가?

의식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지만 삶을 살아가는데 누구나 가치관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가치관들을 따라 살아갑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의 가치관들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무슨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자신의 삶과 정체성을 결정짓는 것이겠죠.

일반적으로 이러한 가치관들은 그 사람의 직업, 학교, 출신지역, 종교 등 자신의 삶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집니다.

예를 들면 "역시 경제학을 한 사람이라..", "누가 **학교 출신 아니랄까봐.." 이런 것들이지요.

이런 생각을 하며 문득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역시 교회다니는 사람이라 달라!" 저는 이런 말보다는 "너도 교회다니냐?" 이런 말들 들었습니다. ㅠ.ㅠ

저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제 삶 속에서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게 물어봤습니다.

"난 진짜 예수쟁이일까?"


2. 나는 짝퉁이다.

정말로 나는 무엇에 근거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경제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경제학이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누리는 효율성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학이란 학문을 10여년 이상 하다보니 저는 모든 문제의 관점을 효율의 관점
 
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효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니 수월성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지요.
 
이러한 사고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는 "성장이 분배보다 중요"하고 "교육의 형평성보다는 수월성이 중요'하고
 
"어설픈 분배정책보다는 시장친화적인 정책이 오히려 소득불평등을 완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경제활동들 역시 철저히 효율성에 관점에서 판단합니다.
 
저는 효율성을 중시하는 것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가치관이 적어도 신앙에
 
기반하지 않고 세상에서 배운대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제 삶 속에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진짜 예수쟁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3. 이랜드 파업 300일
 
어제가 이랜드 파업 300일이 되는 날입니다. 관련하여 글을 쓰려고 했는데 마침 poolbat님이 글을 올리셔서
 
poolbat님의 글을 읽으며 이랜드가 상당히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이며 현재의 사태가 이랜드 입장에서 불가피한
 
면이 있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곳을 통해서, 언론을 통해서 이랜드의 이야기를 접해 왔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상황까지 올 수
 
밖에 없음을 어느 정도 이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일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일인가 물어
 
본다면 답은 쉽게 나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랜드의 경영위기는 철저히 세상적인 방식으로 추진되어졌고 또한 세상적인 방식으로 해결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랜드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잘못한 것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잘못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하나님을, 자신의 이웃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감히 말씀드리면 이랜드는 본질적으로 저처럼 겉은 신앙인이지만 효율이라는 세상 가치관을 가지고 운영되는 짝
 
퉁 기독교 기업일 뿐입니다. 
 
 
 
4.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
 
저는 이랜드를 욕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욕할 자격도 없습니다. 저나 이랜드나 거기서 거기일 뿐입니다.
 
저는 300일이 넘게 진행되는 이번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게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찾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옳고 그르건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방식
 
그대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시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물음을 가지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찾고 계신 것 같습니다.
 
 
 
요즈음 기도를 하면서 생각나는 말씀이 아모스서 5장 21-24절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삶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지 못합니다. 삶으로 예배를 드리지 못합니다.

세상속에서 철저히 세상논리로 살아가니까 문제가 발생하고 그 문제를 또 세상논리로 풀어가는 악순환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삶이 예배가 안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5. 쉽지 않은 그러나 가야할...

이 험하고 치열한 세상에서 삶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는 물음이 한편에 있습니다.

이러한 물음에 이사야서 1장 14~20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하나님은 와서 이야기하라고 하십니다.그리고 잘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설령 잘못했더라도 그것을 알면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

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기꺼이 순종하는" 그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가치관을 가지고 자기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소리통이 되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꿈꿔봅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서 1장 14~20절 말씀을 나눠 봅니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고 배반하면, 칼날이 너희를 삼킬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서 많은 생각들이 들게 되었습니다. 정리가 안되지만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 해보렵니다.
 
두서없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1. 나쁘다?
 
사람이 살다보면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종종 저는 최악의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단지 그 선택에 문제가 있는 것 뿐입니다.
 
단 하나의 선택을 가지고 그 사람을 나쁘다고 비난한다면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자평하는 그 사람이
 
참 억울하고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일어나서 누군가 상처를 주면 그 문제 자체를 지적하는 동시에
 
그 사람이나 단체 자체를 나쁜 사람이나 나쁜 단체로 규정하는 것을 우리는 쉽게 봅니다.
 
저는 이런 낙인찍기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낙인을 찍어버리면 나쁘다고 규정된 사람이나 단체는 적이 되어 버립니다.
 
물론 이것의 반대 경우도 존재합니다.
 
적과는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뢰관계가 깨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들이 점점 꼬여가는 이유가 바로
 
서로를 적으로 여기는 이러한 낙인찍기에서 비롯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런 낙인찍기는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2. 나는 항상 옳다?
 
열린마당에 올라온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똑같은 단체를 보고 서로 다른 평가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똑같은 사건이나 사실을 보더라도 자신의 경험과 주관적인 생각으로 그것을 해석합니다.
 
이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가 그 사물이나 사건 전체를 바라보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나도 틀릴 수 있고 내가 모르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등의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기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행동이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이런 부분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진정한 성장이 가능합니다.
 
얼마나 담담히 자신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느냐가 중요합니다.
 
 
 
3.  하나님이 희망이다?
 
부흥 100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에 여러 곳에서 기독교에 대한 안좋은 얘기들이 오고 갑니다.
 
비판을 받는 쪽이나 비판을 하는 쪽이나 서로를 이해하기 보다는 오해가 쌓이고
 
함께 해결책을 찾기 보다는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듯 해서 가슴이 아픕니다.
 
과연 하나님이 희망일까하는 회의도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희망이 없다면 내게도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희망이 있기에 이랜드에도 희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랜드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과 애정이 여전히 있습니다.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글 하나를 첨부합니다.

 
저는 쉽사리 희망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 아니라 정직한 절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실 변화에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신뢰를
 
잃어버렸는지, 우리가 얼마나 부실하고 자기 실력이 없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철저하게 절망하고 또 절망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사이비 희망과 타협하지 않는 것,
 
희망의 거품을 씻어내는 것, 그리하여 저의 희망찾기는 사실상
 
희망버리기이고 오히려 절망 껴안기 입니다.
 
한번은 치열하게 자기 부정을 치른 사람만이
 
참된 자신을 세울 수 있듯이,
 
정직하게 절망의 심연에 도달한 사람만이
 
희망의 문을 향해 새벽처럼 솟아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봄은 추운 겨울이 다 지나간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한겨울 몸속에서
 
이미 자라나 있습니다. 희망은 절망의 몸 깊은 곳,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기본부터 시작하는 고통의 한가운데서 잉태되어 나오는 것임을 저는
 
굳게 믿습니다.
 
박노해,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중- 
 

(1) 시사회
 
몇일전 학교에서 열린 '화려한 휴가'의 시사회에 갔습니다. 화려한 휴가는 1980년
 
전두환일당이 일으킨 광주 5.18 10일간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를 보고 감독과 배우들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제 머리속에 맴도는 질문은 왜 또 5.18인가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이제는 일반인의 기억은 물론 광주사람들의 기억속에서도 조금씩 잊혀져 가는 5.18이
 
도대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화살표를 누르면 예고편을 보실 수 있습니다
 
 
(2) 화려한 휴가
 
영화는 광주에서 고3인 동생과 사는 택시운전사 민우의 소소한 일상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무고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세금으로 만든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무자비
 
하게 폭행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눈 앞에서 억울하게 죽은 동생과 친구들을 보며
 
민우는 총을 들고 계엄군과 싸우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계엄군의 총에 죽습니다.....
 
 
(3) 1980년 5월의 광주는 아직도 계속 된다.
 
영화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이 무엇일까?
 
제 머리속에 고립이라는 단어가 맴돌았습니다. 1980년 5월 그 10일동안 그 누구보다 도움이 필요한
 
그들은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왜 당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억울한데 자신들의 생존을 자신의 힘으로만 지켜야 했던 그들을 보면서
 
지금도 이 땅에서 사람들의 무관심속에 저렇게 고립되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또 다른 1980년 5월의 광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4)  2007년 7월 또 다른 광주
 
오늘 홈에버에 공권력이 투입되었습니다. 사측이 나쁘고 노측이 옳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왜 잘 다니던 직장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만둬야 하는지 그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무관심 속에 고립되어 이들은
 
싸우다가 자신들의 세금으로 만든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습니다.
 
1980년 5월의 광주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5) 비정규직이 뭐가 문제야?
 
이번 일로 고통을 당하시는 분들 대부분이 30대 이상의 여성분들이고 대부분 80만원 내외의 봉급을 받고
 
있는 분들입니다. 민노당 노회찬의원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능력도 안되면서 무리해서 까르푸를 인수하고 막대한 금융비용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약자인 월급 80만원짜리
 
비정규직부터 구조조정하는 이랜드는 기업경영의 자격이 없다."
 
1997년 IMF 금융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가장 큰 변화는 안정적인 직장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직장인들이 상시 구조조정의 두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가슴아픈 것은 이러한 구조조정의 칼날을 가장
 
먼저 맞는 사람들이 가장 힘없고 빽없고 나이많고 능력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는 누군가 져야하는 부담을 너무도 손쉽게 가장 힘없고 빽없고 능력없는 사람들에게
 
전가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구조가 이제는 가난의 대물림, 양극화의 심화 그리고 힘없고 빽없고 능력없는 사람들의 소외라는
 
심각한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힘없고 빽없고 능력없는 사람들의 생존권 자체를 빼앗아서는
 
안됩니다.
 
 
(6) 주님은 어디에?
 
대학시절 5.18 비디오를 보면서 들었던 의문이 화려한 휴가를 보면서 다시 생각났습니다.
 
1980년 5월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그리고 다시 묻습니다. 2007년 7월 20일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하고 싶으신가 생각해 봅니다.

1. 배경
 
1인당 GDP는 오르지만 우리의 행복은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시장중심의 경제체제는 더 이상 그 어느 누구도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햇빛이 비췰 때 건초를 말리듯 벌 수 있을때 확실히 벌어야 합니다.
 
생계유지에 자신의 삶을 바쳐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구조의 한 가운데 '비정규직'의 문제가 있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7년 자료에 따르면 전체 임금근로자의 36.7%가 비정규직 근로자이며 비정규직 근로자는
 
정규직 평균임금 (월 198만 5000원)의 64%인 127만 3000만원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이들에게는
 
퇴직금이나 복지혜택은 물론이고 사회의 안정망조차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지 최빈곤층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7월 1일 개정된 비정규직 법안을 시행하였습니다.
 
개정된 비정규직 법안의 핵심은
 
1. 기간제(계약직) 근로자가 2년 이상 계약직으로 일하면 사용주는 사실상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2. 정규직과 같거나 비슷한 직무를 수행하는 비정규직은 임금이나 근로조건에서 차별받으면 안된다.
 
이 두 가지입니다.
 
이 중에 논란이 되는 것은 첫번째 조항입니다.
 
사측은 이 조항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저해한다고 반대하고 노측은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2년이라는
 
제한으로 인해 비정규직의 고용안정성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개정 안의 시행이후 근무기간이 2년 경과한 비정규직에 대한 기업의 대응은 두갈래로 갈라졌습니다.
 
재무구조가 탄탄한 대기업들은 정규직 전환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재무구조가 약한 기업들은 비정규직의 해고
 
를 선택했습니다. 신세계 계열사인 이마트는 비정규직 전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러나 이랜드 계열사인 홈에버는 일부을 제외하고 비정규직을 해고 했습니다.
 
 
 
2. 하필이면 이랜드...
 
정말 하고 싶은 얘기의 시작입니다. 경제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정규직 전환 대신 비정규직의 해고를 선택한
 
기업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업의 목적은 사회공헌이 아닌 이윤극대화입니다.
 
이윤극대화를 위해서 합법적인 범위내에서 비정규직을 해고했다면 비난할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대책없이
 
그 법을 만든 닫힌 정부를 비난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랜드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자랑하는 이랜드........
 
 

작금의 이랜드의 상황은 이랜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새 비정규직 법안이 시행된 이후 비정규직을 해고한
 
대기업의 첫 사례이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나라 전체 기업측과 노동계측의 기싸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싸움에서 노측이 이기면 추후 다른 기업들은 쉽게 비정규직을 해고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측이 이기면 비정규직의 해고는 연쇄적으로 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는 사생결단으로 홈에버의 비정규직 해고 철회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랜드의 선택은 추후 우리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준거점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3. 십일조 150억원 내는 회사
 
인터넷 포털에 십일조 150억원을 십일조 대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쓰라는 조소성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이랜드..사회사업도 많이 합니다. 선교와 기독교 문화에도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회사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기독교 기업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이랜드가 많은 비난을 감수하면서 이런 결정을 내린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기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을 표방한 기업이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기업이라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회사가 망한다고 할 지라도 정규직 전환을 해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기업이라면 주판알을 튕기기 앞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 상황은 하나님께서 이랜드가 진정한 하나님의 기업인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연출하신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이랜드의 선택을 통해 깨어진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4. 진정한 기독교 기업
 
주일날 예배드리고 십일조도 열심히 내지만 세상 속에서 온갖 편법과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
 
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듯  주일날 쉬고 매주 월요일 사내 예배를 드린다고 기독교 기업이 아닙니다.
 
해외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사를 파송한다고 기독교 기업이 아닙니다.
 
진정한 기독교 기업은 제품의 생산과 판매, 고용 등 경영전반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회사여야 합니다.
 
 
이번 이랜드 사태가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는 이 땅의 노동현실에 하나님의 공의가 회복되는 기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제가 참 좋아라 하는 예수쟁이중에 하나가 박노해라는 분입니다.
 
98년에 8.15대사면으로 풀려나서 모TV프로그램에 박노해씨가 출연했습니다.
 
사회자가  박노해씨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저는 남과 북의 아이들과 함께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을 지나 평양을 지나
 
만주벌파과 시베리아를 넘어 유럽을 가보는 것입니다."
 
대학4학년이었던 그 때 꿈은 대통령. 군인, 사장, 과학자, 교수 등 무엇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꿈이란 내가 무엇이 되고 싶으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고 싶으냐라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꿈이 무엇이 되느냐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내 꿈은 내가 무엇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하는 미래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꿈이 실현될 가능성도 그리 높지 않습니다.
 
꿈이 어떤 일을 하고 싶으냐의 수준이 되면 내 꿈은 현실의 일이 됩니다. 그 꿈이 완성되느냐와 상관없이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꿈을 이루며 살아가는 수준에 있는 것입니다.
 
박노해씨의 대담을 듣고 우연치 않게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연설을 마음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I have a dream that my four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4명의 자식들이 피부색에 의해 평가을 받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흑백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꿈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마다 하나님은 제게 정면 승부를 원하십니다.
 
"네 꿈이 뭔데?"
 
"출세? 대박? 로또당첨?"
 
"하나님 나라이지요. 제 삶의 영역뿐만 아니라  이 땅 위에도 하나님이 임하시는 좋은 나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라!
 
화해와 일치가 있는 나라!
 
진정한 정의사회가 구현되는 나라!
 
진정한 복지국가!"
 
예수님의 꿈! 하나님나라
 
그러고 보니 예수님도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수준의 꿈을 꾸셨네요. 하나님나라를 일궈가는 꿈!
 
그래서 목사님 말씀처럼 하나님 나라는 완성은 안되었지만 이미 임한 것입니다.
 
햇수로 34년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은 계속 제게 제대로된 진정한 꿈을 꾸길 원하신다는 물음이 생겨납니다.
 
이런 꿈에 승부를 걸어야 하지 않겠냐고 꼬시십니다.
 
"하나님 나라"
 
부흥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새벽기도를 나오면서 게시판을 읽으면서 안디옥 프로젝트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안디옥 프로젝트의 본질이 무엇인가?  
 
만약 안디옥 프로젝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라면 아마도 안디옥 프로젝트는
 
하나님께서 함께 꿈꾸자는 나들목가족에게의 초대가 아닐까요?
 
더이상 너만의 그 무엇이 되겠다는 헛된 꿈을 꾸지 말고 함께 무엇을 하자는 꿈을 꾸자는 하나님의 권면이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려는 얌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교회의 꿈, 목사님의 꿈, 하나님의 꿈이 아닌 우리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치열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창의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꿈꾸는 것이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네 꿈이 뭐냐?
 
네 꿈과 나는 무슨 상관이냐?
 
내 꿈이 네 꿈이냐?
 
나들목의 꿈이 네 꿈이냐?
 
우리 안에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다면.....
 
OTL
크리스마스 저녁입니다. 올해는 교회도 안가고 하루 종일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TV를 켜니 성탄절 특집프로그램도 없습니다.
 
캐롤도 안들리고 특집프로그램도 없고 점점 크리스마스가 시시해져 갑니다.
 
왜 이렇게 크리스마스가 시시해져갈까 생각을 해봅니다.
 
점심을 먹고 세탁기 호스가 망가져서 근처 전자대리점에 세탁기 호스를 사러 다녀왔습니다.
 
크리스마스라서 휴업일 줄 알았는데 정상영업을 하더군요.
 
주차장에서 차를 빼어 나오면서 길거리를 봤습니다. 모두다 평범한 일상의 모습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노점상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평소와 다름없이 장사를 하시고 고물을 주워 나르는 할아버지도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가십니다.
 
크리스마스는 많은 사람들 특별히 가난한 이웃들에게는 그냥 그런 365일중에 하루일 뿐인듯 합니다.
 
왜 그럴까?
 
잠시 고민을 하니 문든 든 생각이 크리스마스의 따뜻함이 사라졌기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고 보니 요즈음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이 이 따뜻함, 사람냄새 뭐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유재석같은 훈남이 뜨는 이유 역시 따뜻한, 인간적인, 사람냄새 나는 사람들이 드물어서 일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9시 뉴스를 보니 올해에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찾아가서 선물을
 
주는 등의 따뜻한 이야기들이 쏘옥 사라졌네요. ㅜ.ㅜ
 
훈훈함이 사라진 그냥 그런 크리스마스.....
 
상업화를 탓하기 이전에 왜 내가 먼저 훈훈한 기운을 나누지 못했나 반성해보게 됩니다.
 
특별히 이번달에 저희 모임에서 읽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라는 책을 읽으면서
 
함께 나누는 삶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그리고 내 삶을 얼마나 풍성하게 만들게 되는지 깨닫고 반성하게 됩니다.
 
저는 지식이 풍부한 사람, 혹은 똑똑한 사람 즉, 머리로 사는 사람이 이 세상을 바꾸기 보다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 가슴으로 사는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피복공장의 여공을 돕고 싶다는 전태일의 가슴 따뜻한 소박한 동기가 이 땅의 노동운동에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청량리역의 노숙자에게 최일도 목사님이 사준 라면 한그릇이 빈민을 위한 천사병원과 밥퍼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연탄집게에 강제로 화상을 당한 10대 성매매 소녀에 대한 전우섭 목사님의 연민과 분노가 성매매여성과 이중문화
 
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동두천의 다비타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태어난 치타공의 굶어 죽는 사람들을 보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유누스 교수의 결심이
 
그라민 뱅크가 되었습니다.
 
저 역시도 제가 있는 곳에서 제 이웃들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제 작은 노력이
 
저도 모르게 이 땅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 깨달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끔씩 하나님께서 왜 나를 대한민국에 태어나게 하셨을까 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1974년에....

우스개 소리로 70년에서 74년생들을 대략 우울한 낀 세대라고 합니다. 386도 아니고 신세대도 아니고 (물론 우리는 X세대입니다.ㅋㅋ)

베이비붐 마지막 세대로서 가장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학력고사를 통해 대학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쟎아요라는 영화가 히트를 했던..참고로 당시 학력고사 지원인원은 100만명 내외고 대학정원은 20만명이 채 안되던 시절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할때 즈음 외환위기가.....(1998년에는 30대 대기업에서 소수의 몇개의 기업을 제외하고 채용이 전무했더랬죠.)

그 살벌한 취업경쟁을 뚫고 직장을 잡아서 이제 결혼해서 집을 마련하려고 하니 대략 단군이래 최대의 집값 상승....

OTL

그래서 하나님께 시위성 멘트를 날려봅니다. "하필 왜 대한민국에, 그리고 이 때에...."

사실 이러한 물음을 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마음 속에 이런 마음을 주시더군요.

"네가 있는 곳과 때가 다른 곳보다 더 문제가 많고 어려움이 많은 때라고 생각하느냐?"                                 

"그럴수도 있지. 만약 그렇다면 네가 할 일이 참 많겠구나."                                                                      

" 네가 할 일이 많다는 것은 너에 대한 나의 기대가 크다는 말이 아니겠니?"                                                 

"깨어진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랑을,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펼치기 위해서                      

다른 곳에서 다른 때에 태어난 사람보다 더 큰 일을 해야하는 것이란 생각은 안드니?"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더 큰 일을 한다는 것은 결코 부담이 아닌 특권이란다."

얼마전 북핵 사태를 놓고 기도하면서 제게는 이런 마음이 생겼습니다.

"베트남처럼 무력이 아닌, 독일처럼 돈이 아닌, 진정한 화해를 통한 평화(샬롬)의 통일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아닐까?"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민족이 하나가 되는 통일을 우리는 꿈꿔야 되지 않을까?

북핵은 이러한 하나님의 기대에 무감감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아닐까?

오랜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흥회나 집회 등을 통하여 비젼을 꿈꾸고 비젼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종종 헌신할 마음은 준비가 되어 있는데 무엇을 꿈꿔야 할지 모르겠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신학을 해야하고 목회를 하거나 오지에 가서 선교를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비젼이라고들 착각하곤 합니다. (목회나 선교를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매우 귀한 일이지만 이게 전부는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부나 선교단체에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비젼을 못찾고 사회에 나가서 망가지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환경과 상황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상황과 현실에 잇대어

구체적으로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비젼을 꿈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 3학년때 즈음 Foreign Affair지에 게재된 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의 Social Capital이라는 논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후에 이 책은 Trust라는 두꺼운 책으로 출간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동 논문에서 후쿠야마교수는 사회구성원간의 신뢰가 지속적인 사회발전의 가장 큰 요소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지연, 학연, 혈연으로 복잡하게 엮여있는 한국사회는 21세기에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후쿠야마 교수의 예언은 현재까지 적중한 상황입니다.
 
요즈음 책을 읽고 신문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저신뢰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얼마전 모 TV프로그램에서 경제정책과 관련한 여당 및 정부와 야당간의 토론를 시청한 적이 있습니다. 계속 시청을 하다보니 양측이 하는 이야기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토론에 참여한 패널들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감잡았는지 야당쪽 의원이 한마디 하더군요. "내용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저쪽은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뭐 이런 주장을 하더군요. 결국 자신과 생각이 같건 다르건 간에 저쪽은 믿을 수 없다. 그러니 무조건 반대가 뭐 이런 것과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르겠더군요.
 
이러한 저신뢰의 문제는 우리 사회 곳곳에 다양한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학교는 학생과 학교간의 갈등으로 학생들이 출교된 상황입니다. 제3자들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지만 서로간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믿지도 않고 귀기울이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대화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회의가 들더군요.
 
그러고보면 이런 저신뢰의 문제는 교회안에도 만연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다보면 말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면 그런 말실수는 쉽게 넘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뢰의 관계가 없다면 그 말실수에 집중하게 되고 본의아니게 그것이 확산되어 공동체를 무너뜨릴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과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이라는 책들을 읽으면서 책의 내용과는 별도로 어쩌면 대안의 마련보다 이 저신뢰라는 문제가 우리사회의 가장 큰 급선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여정부가 들어서고 다양한 정책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좋은 정책도 있고 나쁜 정책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부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모든 정책은 진보와 보수로 부터 동시에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신뢰가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대안이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참여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너무 정치적인 발언이라고 불쾌하신 분들은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러한 고민들 속에서 우리가 사회에 부을 수 있는 맑은 물이 무엇인가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이 사회에 믿음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우리가 이 땅 위에 부을 수 있는 맑은 물이 될 수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통하여 자기가 속한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신뢰의 씨앗을 어떻게 심을 것인가 함께 고민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신뢰와 관련하여 제가 좋아라 하는 박노해님의 글을 한편 띄웁니다.
 
박노해의 ‘오늘은 다르게‘ 중 ‘믿을 信자를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하루 당신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야" "난 너를 믿어" "우린 널 신뢰해" 라는 말이 아닌가요.

때로는 사랑한다는 말보다 신뢰한다는 말이 더 깊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신뢰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지만 신뢰하면서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사람은 관계 그물망 속에 살아가기에 인연마다 신뢰의 꽃을 피워내는 사람에게
우리는 힘을 모아 줍니다.

그래요,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 참된 성공을 이룬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면 비결은
결국 인간관계를 잘 하는 능력에 있고 그 핵심은 신뢰임을 알게 됩니다.

세계 변화가 빠를수록, 국경이 낮아지고 정보화가 진전될수록, 미래가 불확실할수록
신뢰가치는 더욱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뢰 없이는 미래도, 희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뢰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신뢰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의 무엇을 믿는 걸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는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요.

신뢰란 첫째, 정직투명성입니다.
우리는 정직한 사람, 뱃속이 환하게 보이는 사람을 신뢰합니다.
그가 내건 명분의 속셈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할 때 우리는 그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자신에 정직하지 못할 때 누가 신뢰하겠습니까. 그래서 정직의 다른 이름은 '비참함' 입니다.
자신의 부실함, 자신의 거짓됨, 자신의 과오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깨끗이 드러낸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 비참함을 감내하면서 자기 자신을 바로 보고,
다시 분투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을 우리는 신뢰합니다.

둘째, 신뢰란 진정한 자기 실력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실력이 없는 사람을 우리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착해도 무능이
사람을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실력을 넘어선 주장이나 사명감은 그 선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파탄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자기 주장과 포부를 책임질 수 있는 진정한 실력이 없다면 그것은 허장성세이고
추한 탐욕이 되고 맙니다.

셋째, 신뢰란 결과에 대한 책임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실패에 대해 깨끗하게 책임지는 사람을 우리는 신뢰합니다.
과거를 철저하게 성찰하지 않고 조건 탓, 남의 탓만 일삼으며 자기를 합리화하고,
자신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는 사람은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할 위험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사람은 과거 속에서 계승해야 할 가치마저 살려내지 못합니다.
미래준비란 곧 과거 정리이고, 개혁이란 곧 과거 청산입니다.
청산돼야 할 것들에 의해 부당하게 억눌리고 가로막혀온 미래 가치를 키우는 것이 개혁입니다.

넷째, 신뢰란 미래창조 능력입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는 시간을 뚫고 살아 날 수 있는 사람인가가 중요합니다.
늘 치열하게 학습하고 겸허하게 배우는 사람, 새로운 감성으로 미래의 주인공인 신세대와 소통하는
사람, 익숙한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낯설고 새로운 인연으로 자기를 쇄신하는 사람,
건강한 몸으로 긴장과 집중력을 유지해가는 사람, 변화 속에서 변해서는 안될 것을 지키기 위해
처절한 자기 변화를 이뤄가는 사람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신뢰란 결국 그를 움직이는 동인이 무엇인가, 그의 가치관이 올바른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사랑인가, 힘없고 작은 이웃에 대한 강인한 애정인가, 정의와          
진리에 대한 열정인가, 나눔과 연대와 공동선에 투철한 사람인가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이 달라집니다.

이 불신의 위기 속에서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고 살아갑니다.
큰 일이 났다고 해서 작은 일을 잊어버리면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큰 것을 잃어버렸을때는 작은 진실부터 살려가야겠지요. 내가 먼저 믿음의 사람이        
되고, 그 푸른 메아리가 나와 인연 지어진 관계 그물망을 타고 창조적 맴돌이를 하도록
오늘, 다시 시작입니다.

맑은 물이 담긴 큰 그릇에 약간의 검은 물을 떨어뜨리면 맑은 물 전체가 검게 됩니다.

이 물을 다시 맑게 하려면 더 많은 맑은 물을 넣으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세상도 이러한 이치이지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의 영향력이 더 크지요. 그리고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영향력보다 긍정적인 영향력이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영향력은 무엇인가를 못하게 하는 속성이

있지만, 긍정적인 영향력은 무엇인가를 하겠금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번 주에 묵상을 하면서 제 안에 이 부정적인 영향력과 긍정적인 영향력이 서로 싸우고 있으며

하나님이 없다면 부정적인 영향력이 백전백승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좀 더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고 좀 더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려는 노력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물음이 책읽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번 달에 세상읽기 모임에서 읽고 있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이라는 책은 소위 진보적인 사람들의

한국사회를 위한 대안을 정리한 책입니다. 처음에는 제 안에 있는 소위 "운동권"에 대한 반감 때문에 비판적으로

이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이 제게 무슨 유익이 있는지 회의감이 들더군요. 좀 더 긍정적으로

이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배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며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한국의 상황, 경제적 대안, 통일의 대안, 정치적 대안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통일에

관한 이 책의 내용과 지난주 새벽예배때 정진호 교수님 말씀과 이번 주 수요예배 때 청년부의 아웃리치 영상을

잇대어 통일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 고민해 보았습니다.

책에 보면 현재 남북경제협력 특히 개성공단의 한계에 대한 지적이 있습니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대부분의 기업들이 값싼 노동력을 이유로 이 곳에 입주했다는 것이죠. 따라서 북한의 인건비가 상승하면

언제나 이 기업들이 다른 나라로 이전할 유인이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통일민족기업을 제안합니다. 이 책에 따르면 베트남 등 여타 공산권 국가와 달리

북한은 90년대 이전까지 농업보다는 공업이 발달된 국가라고 합니다. 따라서 과학기술과 관련한 고급인력들이

있고요. 이러한 북한의 고급 인력을 활용한 남한과 북한의 경제협력이 이루어진다면 높은 생산력 덕택에 남과 북

의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고 남과 북의 경제를 하나로 엮을 수 있다는 것이죠.

이 부분을 읽으면서 평양과기대를 생각했습니다. 평양과기대가 설립되고 졸업생이 배출되면 이 고급인력들과

남한의 신앙인들이 함께 혁신적인 통일민족기업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기업을 통하여 북한 주민들

이 남한 사람들과 대등하게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북한경제의 자활을 돕고 자연스럽게 북한 선교도 가능할 것입니

다. 그리고 이러한 기업들을 도울 수 있는 펀드를 조성하거나 은행을 만들면 금상첨화겠죠?

이를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 기대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이 하나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창조적 반응이 아닐까요?

세상읽기를 하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깨달음과 물음을 주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어떤 창조적 반응을 할 수 있는가?

나는 공동체와 세상을 향해 맑은 물을 붓고 있는가?  

이를 위해서 나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우리 공동체안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창조적 반응을 하기 위한 모임들이 많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창조적 반응을 하며 살겠다는 다짐이 그리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꿈을 찾는 가족들이

많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부유한 노예를 읽으면서 삶이 아닌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현실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과 이에 대한
 
대안의 필요성에 대하여 공감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대학시절부터 왜 복음이 사회에서 무력한가에 대한 답답한 마음과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이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면 우리가 탁월한 복음을 개인과 교회 안에만 가두어 놓은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에서는 신앙인으로 살지만 세상에서는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갑니다.
 
사실 세상이라는 것이 판도라 상자와 같아서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배경 연령과 지역에 따라서 각각의 입장이
 
현격하게 다르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세상에 대한 논의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좀 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중심을 맞춘다면 그래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면
 
지금까지 몰랐던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할 소명들을 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가 있습니다.  
 
대안이 없다고 절망하는 이 때에, 갈등과 반목이 극에 달하는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더욱 절실합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소리내어 알리며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 함께 열린 마음으로 이 사회에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이 어쩌면 우리의 시대적 소명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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