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신학의 순례자, 안병무

안병무는 한국신학의 개척자요, 순례자이다. 순례자는 언제나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로운 길을 떠나는 자이다.
예수가 변화산 정상에 올랐을 때,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그리고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 베드로는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마태 17장 4절)라고 머물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산 정상에 머물지 않고 민중이 사는 마을로 내려오셨다. 내려가고 내려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음하고 헐벗고 병들어 살아가는 민중의 마을로 내려 오셨다.

순례자는 어느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늘 새로운 길을 떠났다. 베드로처럼 산 정상이 좋다고 머물어있었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처럼 안병무도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길을 떠나는 순례자였다. 그리고 그는 민중의 삶 한복판에 언제나 있었고, 나라를 빼앗기고 수난 당한 민족의 역사와 가난하고 고난받는 민중이 사는 마을에 내려와 민중의 신학을 하고자 했다.

그는 한국신학의 길을 새롭게 개척한 자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 그는 먼저 걸어가 한국신학의 길을 열어 놓았다. 누구나 길을 걸어갈 수는 있지만, 이미 닦여진 길을 걸어가지 않고, 그의 발걸음 하나 하나가 바로 새로운 길이 되었다. 그가 일생을 걸어가 열어 놓은 길은 곧 한국신학의 길, 그 자체였다.

새로운 길을 개척할 때에는 머리로, 혹은 지식이나 강단에 갇혀할 수 없는 것, 안병무가 열어 놓은 한국신학의 길은 한국 역사 한가운데, 恨과 눈물의 바다가 출렁이는 삶 한가운데에서 그가 몸으로 고백하고, 가슴으로 부딪히며 체험하여 닦아 놓은 길이다.

그는 길을 가만히 앉아 생각으로, 혹은 문자로만 가지 않았고, 그의 삶과 역사와 몸으로 친히 걸어갔으며, 그래서 그의 삶이 길이요, 그의 삶이 곧 신학이 되었다.

길은 걸어갈 때에 비로소 길의 존재 가치가 있다. 길을 알고 있는 것과 길을 직접 걸어가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한국신학의 개척자요 순례자인 안병무가 열어 놓은 새로운 길을 따라 많은 이 땅의 신앙인들은 지금도 걸어간다.


2. 민중의 어머니, 선천댁

안병무는 1922년 평안남도 안주군 신안주면 운송리에서 아버지 안봉식, 어머니 정원숙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안씨 집안은 '송성'이라는 동리에서 대대로 한의사를 가업으로 이어왔으며, 그의 아버지도 한의사 자격증을 얻어 간도에서 한의원을 했다. 그러나 안병무는 그 집안의 남성우월적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언제나 가장 밑바닥 삶을 살아왔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의 정이 남아 있다. 그는

하루 종일 밭이나 마당에서 다른 농사꾼과 똑같이 분주하게 일하는, 이른바 남편의 얼굴은 단 한 번도 정면으로 본 일이 없었다. 그러니 말 한 번 나누었을 까닭이 없다. 그래도 가끔씩 지나치다 자신을 훔쳐보는 남편의 눈을 기억하노라고 했다. 선천댁은 그 집안에서 위계적으로 말하면 가장 바닥에 있었다. 그러니 웬만한 일은 위에서 밀려 밀려 마침내는 그에게로 차례가 온다. 온갖 궂은 일은 결국 다 맡아 하는 것이다.([선천댁], 범우사, 8쪽)

여기서 말하는 선천댁은 그의 어머니를 일컫는 말이다. 선천이라는 곳에서 시집을 온 어머니를 마을 사람들은 선천댁으로 불렀고, 그 역시 '선천댁'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를 회상하는 글을 썼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민중이 무엇이냐? 또는 누구냐? 라는 질문에 대하여 피해 왔는데, 그것은 민중에 대한 대답이 '개념화'되어 실체로서의 민중을 박제해 버릴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어머니 '선천댁'의 삶을 통해 민중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하고자 했다.

나는 이 글을 시작할 때 마음에 민중의 실체가 무엇이냐 라는 숙제를 안고 나의 어머니를 모델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결코 비범하지도 않고 특수한 경우도 아니며 우리 주변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자의 일생이라는 데 적극적인 의미를 두었다. 더욱이나 그는 비문자 계열에 속했으므로 이른바 문화권에서 보면 가장 밑바닥을 헤매는 삶이라는 것이 나의 마음을 끌었다.(같은 책, 206쪽)

안병무는 어머니, 선천댁의 몸에서 자신이 태어나던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선천댁은 지금 임신 10개월인 것이다.... 무거운 배에 손을 얹고 땡볕에 수건을 가리우고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가는 젊은 아낙, 선천댁의 모습 - 그것은 그대로 수난자의 모습이다.
밭에서 허리를 굽혀 밭을 가꾸던 그는 그 자리에 쓰러져서 몸부림을 쳤으나 그 주변에 누구도 눈치 채거나 관심을 가져 주는 자가 없었다. 산통이었다. 그런 몸을 갖고도 그는 해산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을 갖추어 놓고 그가 남편과 함께 살도록 정해진 거처에서 이를 악물었다. 땀과 피와 더불어 그는 세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그의 첫째 아들이었다.(같은 책, 14쪽)

아버지가 한의사 자격증을 따자 아버지는 만주를 떠날 결심을 하고, 어머니와 함께 안병무는 국경을 넘어 연변 '연길'로 향했다. 그리고 간도 용정에 정착을 한다. 아버지는 동네 의사로 환자들을 돌보고 어머니는 쉬지 않고 밭일을 하였다. 그런 환경에서 어린 안병무는 그곳에서 소학교를 마치자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그 때 그가 한 일은 교회 젊은 장로가 하던 조끼 만드는 봉재공장이었다.

나도 그 쪽에 배당되어 하루 종일 재봉틀 돌리는 연습 끝에 '재봉사'가 되고 정해진 날에 열리는 장터로 자전거 위에 산더미같이 조끼를 싣고 여러 것 장터로 다니기 시작했다 . 나보다 공부를 못하던 녀석들이 중학교 교표가 달린 모자를 쓰고 접근해 오면 배알이 꼴리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약속한 대로 나 갈 길은 다르다'라는 것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꿀꺽 삼켜 넘길 수가 있었다.(같은 책, 93쪽)

1년 뒤, 소년 안병무는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로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진학을 고 졸업한다. 학교를 다니면서 안병무는 공부보다는 계몽운동을 주도하고 새로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일을 계속한다. 그가 어려서부터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간도라는 토양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며, 어린 시절 독립운동가들이 마을에 와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또 어머니 선천댁이 독립운동가들을 도와주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간도에는 이미 기독교가 뿌리를 내렸고, 기독교신앙과 교육이 활발하게 전파되어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자연스레 받았다. 그러기에 소년 안병무에게는 이미 어려서부터 민족주의와 기독교신앙이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간도지방에서의 삶이 민중신학자 안병무를 민족주의자로, 또 민중신학자로 자라게 하는 씨앗이 이 때에 뿌려졌다고 볼 수 있다. 소년 안병무가 중학교를 졸업하자 선천댁은 그 동안 정성스레 모아두었던 돈을 내어놓으며 계속 공부할 것을 권한다.

나는 이제는 더 이상 너를 도울 길은 없다. 그러나 나는 네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다. 일본 동경에서는 고학으로 공부할 수 있다니까 너는 일본으로 건너가 진학할 준비를 해라. 이것이 내가 그 동안 모아 둔 여행비의 전부다.(같은 책, 108쪽)


3. 제도적 교회에 대한 회의와 한국신학의 기틀 잡기

어머니의 간곡한 간청에 힘입어 안병무는 일본 대정대학교 문학부에 진학을 하고 공부를 계속한다. 그러나 어렵게 공부를 시작한 청년 안병무는 조선 청년들이 지원병, 학병이라는 이름으로 끌려가고 미혼의 여자들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무모한 침략 전쟁에 내보내 자기 군인들을 무마하는 도구로 사용돼는 것을 목격하고, 이런 판국에 더 이상 머무를 이유도 없었고 있을 수도 없어 한국의 학생들은 귀국하였고, 안병무도 문학부 예과 3년을 수료하고 돌아온다.

그는 돌아와 학업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한 신앙, 한 몸, 한 마음을 이루며 살아 보자는 의미에서 '일신회'라는 모임을 구성한다. 그 때에 안병무는 신학을 하지 않은 상태이지만, 교회 개혁을 위한 새로운 교회를 꿈꾸며 '일신교회'를 세우고 예상에도 없던 목회 아닌 목회를 시작하게 된다.

나는 일신교회에서 점차 소문난 설교자로 부각되었다. 사람들이 몰려왔고 청중들의 자세는 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신의 소리인 양 경청하는 것 같았다. 점점 내게 설교자로서의 자부심이 생겼다. 내가 열심히 준비해서 하는 말 하나하나가 저들에게 끊임없는 변화를 일으킨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육체의 병을 고친다는 목사들이 많은 반면 나는 인간을 변화시키고 잘못된 마음을 고친다고 믿게 되었다. 한마디로 나는 들떠있었다.(같은 책, 134쪽)

그러나 6.25는 안병무에게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신뢰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때, 자신이 뛰어난 설교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변화되어 간 것이 아니라 선천댁의 희생적이 사랑이 그들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부끄러워한다.

또한 6.25가 터졌을 때 교회를 구성한 그리스도인들의 작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꼈다. 열정을 가지고 설교를 하여 그들의 변화되는 모습을 보았는데, 막상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리스도인들은 '자루에 담았던 모래알들'이 빠져나가듯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실망을 했다.

공동체란 의식은 전혀 볼 수 없었고, 이웃 사랑의 냄새는 그 어디에서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르며 아끼는 듯하던 저들이 도망 칠 때 단 한 번도 뒤돌아보려는 자도 없었다. 하느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듯 말 한마디를 황금덩이로 여기는 듯 존중하던 설교자를 염려해서 같이 피난하기를 권하는 사람도, 떠나는 마당에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것이 본래 사람의 모습인가. 교회는 이런 인간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없다는 말인가. ..... 내게 구체적인 충격을 준 광경이다. 교회에서 돈푼이나 가진 사람들의 발상으로 트럭을 한 대 구했다. 그 트럭을 빌리는 비용은 교회의 공금이다. 어느 날 새벽에 서울을 탈출하기 위해 그 트럭이 교회 마당에 세워졌다. 그 안에 사는 목사가 새벽같이 그의 책들, 생활 도구들, 장독까지 올려놓아 트럭의 한 모퉁이가 차버렸다. 돈푼이나 교회 바치는 장로들, 말깨나 하는 집사들, 그것도 특수계급이라고 자기들이 가져갈 물건들을 평신도들의 뜻을 물리치고 권리처럼 먼저 싣고 직계가족은 물론 친척들까지도 동원했다. 벌써 자리가 차버린 것이다. 노쇠한 교인들, 힘없는 평신도들이 한 자리 얻으려고 아우성이다..... 아비규환이다. 지옥이 따로 있나! 저들은 이미 지옥행 트럭을 타고 혼자 살아 남으려고 하는 것이다. 도대체 교회란 무엇인가? 일생을 통해 듣고 듣던 그 설교들은 거리에 아무 데나 싼 똥덩이처럼 이리 밟히고 저리 밟히다 증발되어 버리고 말았는가.(같은 책, 148-150쪽)

위에 좀 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때 순식간에 그리스도인들과 또 교회 공동체가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붕괴되는 이 경험은 청년 안병무로 하여금, 제도적인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함께 일생을 순수한 평신도로 걸어가는 계기가 된다.

그는 마침내 교회가 유지되는 것은 교권과 경제력에 의한 조직이라는 사실과 성직자와 교권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데 장애물이라는 것을 몸으로 깨닫게 된다.

이것이 무슨 예수의 공동체냐! 예수는 그런 교회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와 민중들의 만남은 스스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어떤 권리도 그 위에 있지 않았다. 예수의 무리들이 피난을 떠난다고 가상하고, 그 교회에서 장만한 트럭을 결부시며 보라. 그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같은 책, 151쪽)

그는 이때 이미 제도적이고 교권중심적인 기성교회에 대한 강한 불만과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기존교회에 대한 불신, '예수 팔아 밥 먹는 것은 옳지 않다'는 순수한 신앙양심을 관철하려는 집념이 싹트게 되었다.
비로소 그는 곧 기존의 기독교를 떠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제도적 교회 안에서 교권에 기대여 안주하는 것이 예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그 때 알았고, 그 때 그 경험은 그가 후에 민중신학을 전개할 때, 제도적 교회를 넘어 민중 사건의 현장을 교회로 인식하는 신학적 체험의 자리가 된다.

일신교회에 사직을 하고 그는 생계를 위해 어머니 선천댁과 함께 떡을 만들어 팔기 위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어머니와 떡메를 친다. 그러면서 노동의 소중함과 즐거운 노동은 노예의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새 것을 창조하는 형태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미끈하게 꾸민 말로써 허상을 향해 마치 신의 대변자나 되듯 거들먹거렸던 삶의 모습과 제힘으로 땀을 흘리며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일을 하면서 새 생활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이 장면을 나는 내 의식 속에서 오래오래 간직했다.(같은 책, 154쪽)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참된 교회와 예수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안병무는 1951년에 옛 일신회 동지들과 다시 만나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을 생각하여 월간지 [야성](野聲)이라는 잡지를 낸다. 그리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반수도자적인 생활을 하는 공동체를 만들려고 시도했으나 이것도 역시 가족 이기주의로 실패하고 만다. 이런 실패를 거듭하는 안병무는 이루지 못한 공동체의 꿈만 안고 평신도에게 신학적 훈련능력을 강화한다는 취지에 동의하여 중앙신학교 창설에 가담한다. 그리고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안병무는 재미있게도 중앙신학교 교수로 재직한다. 그 후 비로소 그는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유학을 가 본격적인 신학공부를 하고 돌아와 신학자로 본래적인 자신의 자리를 잡아간다.

귀국 후, 중앙신학교 교장,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강사, 그리고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한다. 이런 신학적 훈련과 연구를 통해 그는 한국 그리스도인이 궁극적으로 걸어가야 할 '한국신학'이라는 보다 본질적인 신학을 추구하기 위해 1969에는 월간 [현존]을 창간하고, 1973년에는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한국신학을 발전시킨다. 그리고 신학 계간지 [신학사상]을 발행하여 서구, 특히 제3세계신학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주체적인 신학으로서 한국신학을 담아내는 신학지를 창간한다.

[야성]에서 [현존], 그리고 [신학사상]에 이르기까지 그의 문서출판 작업은 하나의 한국신학의 통로역할을 했으며, <한국신학연구소>를 개소시킴으로써 한국신학을 담아내고 촉발시키는 구실을 하게 된다. 그는 신학사상적 노력뿐만 아니라 한편으로 학자들이 소홀하기 쉬운 그 학문을 담아내고 발표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학문의 안과 밖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 온 것이다.
이렇게 한국신학의 외적인 자리와 틀을 만들어 놓은 안병무는 그 자신이 직접 한국신학 한가운데로 들어가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민족신학, 다시 말하면 민중신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4. 민중 발견과 민중신학의 태동

안병무는 독일에서 불트만의 실존주의신학을 연구했다. 그래서 유학 후에 신학교에서 그는 주로 불트만과 실존주의 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민중으로 사셨던 어머니 선천댁과 어린 시절 간도에서 자란 경험은 그의 신학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실존주의 신학에 몰두하였지만, 그것은 개인의 실존이 아니라 선천댁과 같은 민중의 실존이요, 강도 만난 민족의 실존이었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 차원이거나 인간내면적 차원의 실존이 아니고 사회정치적인 현실 속에서 어떻게 결단하고 참여할 것인가 하는 현재적 신학을 말한 것이다. 그는 이미 불트만을 넘어서고 있었으며, 한국의 역사 현실 속에 현재하시는 예수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신학적 눈은 이제 역사적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김성재 교수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970년부터 한신에서는 빈민지역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가서 현장실습을 했는데, 그때 안 선생님이 청계천 빈민지역에 왔다가 충격을 받으시고, 또 그해 11월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충격적인 민중경험이 민중신학의 단초가 되었다고 보는데....([신학사상] 1997 봄호)

그 때부터 안병무의 의식 속에는 민중의식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막연하게 그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던 민중이, 그의 뼈 속 깊이 스며들고, 다시 그의 몸으로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민중으로 살아왔던 어머니, 선천댁을 청계전 빈민지역에서 가난하고 헐벗은 민중 속에서 보았고, 마침내 주체적으로 인간임을 선언한 전태일에게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과 신학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은 1973년에 그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앙선언"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눌린 자와 약한 자와 가난한 자의 최후의 옹호자임을 믿는다. 또한 하느님은 역사에서 악한 세력을 심판하셨음을 믿는다. 우리는 주 예수가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선포하신 것을 믿는다. 메시아 왕국은 악한 세력을 꺾고 재산 없는 자와 거부당한 자와 짓밟힌 자의 안식처가 될 것임을 믿는다. 우리는 성령이 새로운 역사와 우주를 창조하며 또한 각 개인을 부활하고 성화할 것을 믿는다.(기독교교회협의회 자료집 1, 251-253쪽)

서구의 교회들이 "제2의 바르멘 선언"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이 선언은 유신체제하의 한국교회의 신앙고백이며, '한국적인 민중신학의 선언'이었다. 이 선언에서 우리는 한국 민중신학의 태동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선언을 계기로 간도에서의 일제시대와 6.25 경험, 온몸으로 살아온 안병무는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참여를 하게 된다. 반민주, 반인권을 자행하는 유신정권은 민족의 도려내야 할 썩은 부분이요, 새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연히 몰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민중의식을 고취시켜나갔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한가운데 자신의 몸을 투신했던 것이다.

1974년 죽재 서남동과 함께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서명한 이유로 안병무는 정부로부터 경고조치를 받는다. 이러한 민중신학자로서의 안병무는 민중현실 참여로 인한 현실적인 시련이 다가오고, 마침내 1995년에 이계준, 문동환 교수 등과 함께 국가안보를 위하여 면학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교수직에서 강제 해직되기에 이른다.

교수직에서 해임된 안병무는 1975년 8월 17일 한국 민중신학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경험하는데, 그것은 문동환, 서남동, 이문영 등 기독자해직교수와 그 구속자 가족들과 해고된 가자 등이 참여하여 창립한 '갈릴리교회의 설립'이다. 이 갈릴리교회는 '민중교회'의 효시가 됨과 동시에 기독교 민주화운동의 중심적인 장이 된다.

그후 1976년 3월 1일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이문명, 문동환, 서남동, 문익환, 이우정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일명 "명동사건"으로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 즉 민중선동에 의한 국가변란을 획책한 죄로 입건되어 1년여 동안 옥고를 치른다.

이 때 안병무 자신이 직접 몸으로 겪었던 고난과 억압의 민중체험은 감옥 안에서 고난받는 민중을 만남으로 동일시되었으며, 비로소 그는 민중을 발견하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고 민중을 개인 실존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민중을 이해하고 민중신학을 구체화하는 계기가 된다.

출감 후에 안병무는 기장선교교육원 원장으로 취임을 하고 6.25 이후 제도적 교회보다는 예수공동체에 대한 실현을 포기하지 못하고 1980년 개신교 수녀회인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를 설립한다. 그리고 일명 '서울의 봄'이라 할 수 있는 80년대 봄에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복직되지만, 그해 5월, 신군부에 의한 민중학살의 극치가 광주에서 일어나고 안병무는 8월에 교수직에서 강제로 해직된다. 그의 이러한 일련의 끝이지 않는 시련은 보다 구체적으로 민중신학을 실천할 수는 동기를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그의 민중신학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5. 민중과 예수

이제 안병무는 간도에서 어린 시절에 보고들은 독립군의 이야기와 6.25 전후로 경험하는 제도적 교회에 대한 회의, 그리고 지금 민중 한복판에 내몰리고 갇히고 짓밟힌 자신의 모습과 동일시하며, 또 언제나 민중 한가운데에서 온몸으로 살아오신 선천댁을 생각하며, 그의 가치관은 민중이 곧 민족사의 주체요 실체라는 민중중심의 역사관과 가치관으로 전환된다.

그가 감옥에서 만난 민중과 민족의 수난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민중으로 살아오신 어머니 선천댁을 통하여, 그는 민중은 민족사에서 철저하게 잊혀지고 무시되었으나 역사의 실체요 주체라는 사실을 체득한다. 그는 민중의 주체성, 자발성, 역동성과 역사성을 철저하게 믿고 경험했다. 민중은 선천댁처럼 스스로 역사를 이루어간다.

이 땅에 무수히 많은 선천댁, 그 민중은 개인 아니며, 또한 그들이 당하는 고난도 집단적 고난으로 인식된다. 절망적인 고난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목숨까지 바치는 자기초월의 사건이 민중들에게서 일어난다. 이 속에서 메시아적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서남동에게 있어서 성서는 오늘의 민중현실을 위한 전거에 불과했다. 그러나 안병무는 성서와 오늘의 민중현실이 분리되지 않는다. 민중현실의 눈으로 성서를 보고 성서의 눈으로 민중현실을 바라 본다. 서남동과는 달리 성서와 민중현실을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현실로 보는 사고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 속에 속해 있으며 역사를 객관화할 수 없듯이, 내가 나의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를 읽을 때에도 컨텍스트나 텍스트를 객관화할 수 없다.([민중신학이야기] 69쪽)

이처럼 '오클로스', 성서 속에 자리잡고 있던 이 오클로스는 지금 한반도 역사의 한가운데 민중이라는 집단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클로스는 규정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예수는 민중의 지배자, 수령이 되려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그들의 요청에 응했을 뿐이다.

오클로스는... 밖에서 규정할 수 없고 자신 안에 고유한 현실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는 저들을 규합하거나 또 어떤 가치를 가르치기 위해 능동적으로 저들에게 접근하지 않았고 오직 저들의 요청에 응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수동 내지 그들과의 일치의 입장에 섰지, 저들의 지배자. 랍비, 또는 수령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가 오클로스와 斷·續의 관계로 서술된 것에서 본다.([민중과 한국신학], 103쪽)

이처럼 안병무는 예수와 민중을 역동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있으며, 민중과 예수를 동일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자 예수와 피구원자 사이를 구분 짓지 않고 민중과 예수를 동일시함으로 민중구원론을 창출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에게 있어서 이제 민중신학은 민중을 증언하는 것이요, 민중사건이 곧 신학인 것이다. 신학자의 말, 신학자의 언어, 교권과 제도적 교회 안에 감금되어 있는 예수를 민중 속으로, 삶 한가운데로 성육신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예수는 개념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교리와 교권에 갇혀있는 예수가 아니라 민중 속에서 만나는 민중예수, 그 민중예수가 구원의 주체자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이미 교권이나 성직이 없었듯이, 그에게 이미 우상이 자리잡고 있지 않듯이 예수도 교조적인 우상이나 신적 존재가 아니라 민중집단 속으로 들어와 민중이 되신 예수, 바로 그 살아서 꿈틀거리는 역사의 주체자로서의 민중예수가 자연스레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안병무에게 있어 제도적인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질서가 잡히고 계층이 있는 제도적인 교회는 예수공동체가 아니다. 예수와 오늘의 민중현실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교권과 교리요 제도적 교회요, 성직이라고 비판한다. 예수사건은 오늘의 교회에서 일어나지 않고 민중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가 성서신학자로서 성서 안에서 발견한 예수는 이미 민중현장 속에 살아 있었다. 문자로 설명될 수 없고, 문자에 갇혀있을 수 없는 민중, 그 민중을 비로소 감옥 안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민중은 개인이 아니다. 민중은 사회적 전기요, 거대한 생명력이며,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명체이다.


6. 민중, 생명의 화산맥

안병무는 90년대에 들어와 민중신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그는 이전에 이미 [살림]지를 창간하고 "죽임의 세상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민중공동체를 꿈꾸며 살림운동, 곧 생명운동을 제창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 통일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에 대한 관심과 그 신학적 노력이 끊이지 않았다.

이 시기에 안병무에게 나타나는 이 모든 새로운 시도들은 민중에게서 나타나는 생명성으로 집약된다. 90년대에 들어와서 혼란스런 시국 가운데 젊은이들의 분신기도 사건들이 줄을 잇고, 또한 점점 심각한 상태로 몰아가는 자연 생태계의 파괴, 남북분단의 고착화, 이 모든 것을 '민중생명'이라는 보다 근원적이고 실제적인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생명은 생명체를 형성함으로써 각 개체들이 생존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투쟁과 희생, 다른 한편 뒷받침과 협조를 하면서 공존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체계를 깊이 생각하면 미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어느 하나도 생명체라는 큰 테두리 안에 그 위치가 있습니다.([살림] 1990년 8월호, 12쪽)

역사적 실체로서의 민중에 대한 관심이 이제 근원적인 실체인 생명에로 전이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중을 생명의 근원으로 보고 예수 사건을 민중생명운동으로 볼게 된다. 그는 이제 '예수만'을 '생명'만으로 바꾸어 가질 수 있다고 보는데 까지 이른다. 이것은 놀라운 사상적 전환이다. 그는 말하기를 민중신학이 할 일이란 민중이야말로 역사를 생명의 본원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민중생명신학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은 동양적 사고의 배척인데, 나는 요새 한 경험에서 계속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동양의 기(氣)에 대한 것입니다. 성서의 언어로는 구약의 '루아하'(숨, 기운), 신약의 '프뉴마'(영)와 연결되겠지만 보편적인 언어를 쓰면 역시 '생명'이라는 것은 운동이예요. 나는 세계가 옛부터 생명의 실체를 부단히 찾아 왔다고 보는데, 그리스도교에서는 그것을 하느님이라고 불렀지요. 동양에서는 도(道)라고 하지요. 나는 역사 속에서 그 생명이 모든 것을 뚫고 참 생명답고 순수하게 드러난 것이 예수사건이라고 봅니다. 예수는 투쟁하고 죽으면서 생명의 본질을 우리에게 표출시킨 분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놀랍게도 생명의 시각을 등한히 여겨요. 생명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고 대충 넘어가고 맙니다. 생명자체는 모든 도전과 싸우면서 자기를 계속 살려 나가는 것, 체념하면 죽고 싸우는 한에 있어서 사는 가장 순수한 것, 가짐으로써 있는 것이 아니고 생명 그 자체를 신이라는 말로 나타낼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한 가장 순수한 생명을 지닌 것이 민중입니다.(기사연 무크지 2, [민중의 생명을 위한 민중신학] 447-8쪽)

이상의 그의 말속에 민중생명신학의 실체가 드러난다. 하느님의 영은 곧 '생명의 영'으로 바뀌어 표현되고, 예수 사건은 생명이 생명답게 드러난 것이고 예수는 생명의 본질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순수한 생명을 지닌 것이 민중이라는 것이다. 그로써 민중신학과 지식층은 반생명적 악조건과의 싸움에 가담하며, 그 악조건 속에서 자신마저 잃어버릴 위기에 있는 민중이 체념에서 다시 일어나는 생명의 투쟁에 가담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민중을 생명의 근원으로 보는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생명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움직이는 민중을 말했다면, 이제 논하는 생명의 신학은 민중의 뿌리 찾는 작업이므로 결국 같은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고대 고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동양사상적 방법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조선의 역사, 민중의 역사, 그 거대한 산맥을 타고 솟아나는 민중의 힘, 바로 민중은 생명의 화산맥인 것이다. 역사 한가운데에서 솟아나는 민중의 용암들, 민중의 함성, 그것은 곧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이요, 생명의 시작이며 뿌리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작업은 구상만 있었지 더 진척되지 못하였다. 그의 동양신학적 민중생명신학이 구체화되고 전개되어 갔다면, 한국 민중신학이 보다 더 깊고 튼 지평 속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될 것이지만, 여기에서 멈춘 것이 아쉽다. 결국 이 작업은 후학들에게 남겨졌고. 그의 민중신학에 대한 발걸음도 더디 옮겨가기 시작했다.


7. 한국신학의 터를 다져 놓고 떠나시다.

그는 이제 학문적 작업보다는 다가올 미래에 후학들이 민중신학을 더욱 발전시키고 미래의 신학, 세계의 신학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신학 외적인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1992년 9월 '한국민중신학회'를 창립하여 회장에 취임하고 흩어져 있던 민중신학자들과 세대 구분 없이 한데 힘을 모아 새로운 민중신학의 미래를 개척해 갈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한국 민중신학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의 자리매김을 위해 1994년 천안에 있는 '한국신학연구소'를 민중신학공동체로 탈바꿈시키고 재단법인 <아우내> 이사장에 취임한다.

이렇게 그는 한국 민중신학의 초석을 다져 놓기에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이 세계신학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움직이고, 또한 신학 변혁의 꿈을 한국 민중신학을 통해서 실현되리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21세기 한국신학의 미래를 위해 그는 노구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중신학의 터를 다져 놓고, 후학들로 하여금 자신이 못다 이룬 예수공동체, 민중공동체를 실현해 줄 것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민중신학의 외적인 터다지기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땅의 교회와 신학, 그리고 후학들을 위해 자신을 해야할 한국신학 터다지기를 다 해 놓았다고 생각해서 일까, 그는 너무나 갑자기 지난 1996년 10월에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 가셨다. 그는 영원한 민중이셨던 선천댁 어머니 품으로 돌아 가셨다.

그가 이 땅에 와서 한국신학계에 남긴 업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학자로서, 사회운동가로서, 교육가로서 그가 이루어 놓은 업적 보다 문자의 세계, 학문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가난한 민중과 함께 하셨던 예수를 따라 살다가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한국신학계와 그 후학들을 위해 길을 닦아주고, 터를 다져 주고, 그래서 그의 온 생명을 한국 민중신학이라는 터 묻히고 돌아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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