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답이다.

장공은 복음이 사회의 답임을 보여준 이 시대의 큰 스승임이 분명하다.

장공이 작사한 찬송가 261장은 이 시대의 예수쟁이들이 살아가야할 방향을 명쾌히 보여준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1. 어둔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속에 새롭다 이빛 삶속에 얽혀 이땅에 생명탑 놓아간다
2. 옥토에 뿌리는 깊어 하늘로 줄기 가지 솟을 때 가지 잎 억만을 헤어 그 열매 만민이 산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일꾼을 부른다 하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리
3. 맑은 샘줄기 용솟아 거치른 땅을 흘러 적실 때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 앞에 활짝 트인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하늘 새땅아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되어 타거라

복음은 나 하나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가르친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역사 속의 교회를 역설하는 이 찬송(261장) 가사를
쓴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장공(長空) 김재준 목사. 그가 없었다면 한국교회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부끄러운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장공은 한국교회의 사회참여운동에 앞장서며 민주화
운동에 교회가 적극 뛰어들도록 길을 폈고 보수 일색으로 경직됐던 한국 신학계에 현대신학의 물줄기를
들여와 교회 갱신에 힘써 ‘한국교회의 영원한 스승’으로 불린다.

장공은 1901년 함북 경흥의 유교집안에서 태어났다. 한문과 서예에 능통했고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금융조합 서기라는 안정된 직업을 뒤로 하고 1920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YMCA의 시국강좌에 참여하고
도서관의 현대서적들을 탐독하면서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이듬해 승동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장공은 기독교를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신학교를 거쳐 1928년 도미,프린스턴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받으면서 당시 구미를 풍미했던 현대신학 사조를 접하게 된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대부분 근본주의적
신학만 소개한데 비해 미국 본토의 신학은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성서비평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국내에서도 성서비평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성서를 신앙이 아닌 학문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매우 낯선 일이었다.
 

1935년 일제 식민치하의 한국교회는 큰 전환기를 맞이한다. 조선예수교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선교사들이 모두 철수한 것이다. 서양 선교사가 이끌었던 평양신학교도 문을 닫았다. 민족 정신의
최후 보루였던 교회마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갈 지경이었다.
 

장공은 이때 송창근 김대현 등과 함께 ‘조선신학교’를 개교한다. 서양 선교사들이 돌아가 재정 지원 한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조신인 스스로 조선 교회의 목회자를 육성해내는 자주적인 신학교육기관을 세운 것은
순교자적인 결단이었다.
 

장공은 조선신학교에서 성서비평학을 소개하며 한국교회에 충격을 던졌다. 격렬한 신학논쟁이 일어났고 결국
해방뒤인 1953년 장공은 파면된다.
 

장공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성직자들과 함께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을 창설하고
한국교회를 변혁할 목회자 양성을 위해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을 설립한다.
 

1965년 굴욕적인 한·일 수교를 계기로 장공은 사회참여운동에 뛰어든다. 유신헌법 반대,반독재 민주화,민족통일
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주주의와 평화,인권과 생명 수호에 앞장섰다.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의 현실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폭정에 맞섰던 장공은 1987년 1월27일 민주화 운동의 결실을 미처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장공은 신학 연구의 자유,현실 참여의 열정과 함께 신앙의 경건성을 강조했다. 그는 후배 신학자들에게 늘
그리스도의 마음이 살아있는 신학을 공부하라고 말했다.
 

근본주의적인 한국교회에 큰 충격을 주고 생명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상을 제시한 장공은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 독재정권 치하에서 종로5가를 중심으로 한 한국교회가 민주화의 성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장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주화와 신학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12월 장공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김지방기자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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