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처음부터,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구별하여 세우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터무니 없는 과장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아니 나는 이것은 한 사람의 깊은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고, 지금까지의 지나온 역사에도 없고 미래에 올 역사에도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전 피조물 중에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나의 환경, 나의 경험, 나의 생김새에 꼭 맞는 그런 일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창조이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발견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할 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시는 그 일은 아주 독특한 일입니다. 내가 안하면 누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꼭 유일한 인생인 나에게 맞추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쉽고 편한 쪽을 택했고 그 부르시는 소리에 배반했습니다.

제 몸에 신나를 붓고 뛰어나와 노동해방을 외쳤던, 가장 험난한 십자가의 길을 택했던 전태일은 역사의 순리속에서 산화하지 않았습니다. 조건이 무르익어서가 아닙니다. 아무고 그를 주목해 보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에게 눈길하나 주지 않는 암담한 현실 때문에 그는 그의 몸을 바쳐 정면 돌파를 시도한 것입니다. 전태일이 자살한 것을 기독교인들이 나무라기를 좋아하는데 전태일은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무관심이 그를 불태우고, 우리의 이기주의가 그의 목줄을 조인 것입니다. 그는 마치 예수와 같이 자기의 몸을 부숴 역사의 수레 바퀴를 돌려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밥이 없어 굶기를 밥먹들이하는 여직공들을 보고 그는 자기가 버스타고 갈 차비로 풀빵을 사서 나눠주고 자기는 하루 종일을 걸려서 걸어다니곤 했습니다. 수 많은 꽃다운 청춘들이 병들어 사라지는 현실을 대하며 그가 근로기준법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어느 천국의 법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 8시간 근로, 근로조건 등 교육받지 못한 노동자의 손으로 직접 법대로 해 줄 것을 탄원하는 탄원서를 써서 그는 노동부, 법무부로 구청, 시청으로 뛰어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교육 이외에 학교교육을 변변이 받지못한 그가 이런 일들을 처리하면서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가 간절히 소원한 것이 있었습니다. '내게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으면..'하는 것입니다. 그는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은 소위 지성인들입니다. 역사에 대한 비젼도 있고, 전태일의 몇 십배의 지식을 갖고, 앞선 의식을 가진 사람들 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가 역사에 끼친 몫의 10배, 100배 몫을 해야 정상인데... 우리의 몫을 다 합쳐도 전태일 하나가 한 몫을 감당치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더 많은 공부, 더 많은 깨달음,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머리가 터질 만큼 위리의 가슴이 벅찰 만큼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선택입니다. 내 안에 예수, 지금 그분이 무슨 사건,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가 문제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태일의 사랑과 결단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류하는제자들을 뿌리치고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 결단말입니다.

삼십년전 전태일, 이천년전 예수님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 안에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가 내 생활 속에, 나의 삶의 중요한 부분 속에 있어야 하고 나의 삶을 통해 그분의 얼굴이 그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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