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대학생 중의 상당수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재수를 생각합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지요. 특히, 입학 초의 대학 적응기를 보낸 후 지금쯤 되면, "더 나은" 대학에 가야 하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됩니다. 최소한 어느 대학은 가야 사람 행세를 할 수 있다는 생각, 우리 나라에서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대학은 "그 대학" 밖에 없다는 생각, 그리고 그 대학에 가지 못하면 인생낙오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4월부터는 우리 주변의 학우들이 한두 명씩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라진 얼굴들을 보고 싶으면 이른바 "명문학원"에 가보면 됩니다. 그들 중 몇 명은 "더 나은" 대학에 진학하게 될 거고, 나머지는 1년 후 초라한 얼굴로 돌아와 후배들과 함께 강의를 듣게 되겠지요. 그들 중 몇 명은 30년 후 아들, 딸을 다그치면서 "아빠가 그 대학에 못 갔기 때문에 인생이 이렇게 되었다. 그러니, 너는 꼭 그 대학에 가야한다"고 소리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기독 대학생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오늘 저는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분들을 위한 제 나름대로의 조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열등감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면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 대학"에 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자리가 열등감을 없애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에도 최고의 자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외부에서 바라볼 때 사법연수원은 비교적 일찍 성공했다는 청년들이 모여 있는 집단입니다. 그 안에는 열등감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대학을 졸업한 합격생들은 B대학을 졸업한 합격생들에 대한 묘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나이 들어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은 대학 4학년 때 합격한 동료들에 대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은 보다 좋은 성적으로 합격한 친구들에 대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5등으로 합격한 사람은 1등으로 합격한 사람에 대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지방에 발령 받은 사람들은 서울에 발령 받은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성적 때문에 목표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목표를 이룬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열등감이 심한 사람일수록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런 열등감 때문에, 또는 무시 받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변호사인데도 어쩔 수 없이 남의 눈을 의식하여 판검사의 길을 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사법연수원을 예로 들었지만, 세상 어디에도 이런 법칙은 적용됩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외는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일반적 현상을 보면서, 세상의 어떤 자리도 인간을 열등감으로부터 자유케 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최고의 자리를 향해 아무리 달려가 봐도, 그 자리를 확보하고 나면, 또 더 나은 자리가 눈앞에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어디에 가도 자기보다 나은 사람은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이런 열등감으로부터 자유케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나 자신이 어느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존귀한 자임을 깨닫게 될 때만 우리는 이 비참한 열등감의 덫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빨리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그리스도 안에서 열등감을 극복해 봐야, 남들이 나를 우습게 보는데 어떻게 하느냐고요? 그와 관련하여 한 가지 말씀을 더 드리겠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생애 최고의 순간"이 한번쯤 있게 마련입니다. 직장에 취직하는 순간일 수도 있고, 박사학위를 따는 순간일 수도 있고, 결혼하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문제는 어떤 사람들에게 이 순간이 너무 빨리 찾아온다는데 있습니다. 즉 대학입학과 동시에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겨우 10대 후반의 나이에 마치 온 세상을 다 소유한 것처럼 가문 전체의 축하를 받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 5년, 10년이 지나도록, 학력고사 때 자신이 영어에서 몇 개 틀렸고, 수학에서 몇 개 틀렸는지를 정확히 기억하고, 끝없이 그 점수 이야기를 반복하는 친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제가 잊고 있던 저의 학력고사 점수까지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학력고사 점수를 가지고 대학에 입학하던 시점이 그에게는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그는 학력고사 이후 더 이상의 자랑거리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대학입학과 동시에 인생의 목표를 거의 다 성취한 그에게는 더 이상 노력할 거리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지요. 다른 친구들이 작은 목표들을 성취해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친구는 나보다 학력고사 점수가 13점이나 적었던 친구인데..." "저 친구는 나보다 35점 적었던 친구인데..."라고 말입니다. 혹시 마음에 드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아직도 기뻐할 많은 순간이 남아 있으니까요. 이미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한 사람들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마련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만약 이미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여 가족들이 부르는 만세 소리를 들었다면, 빨리 그 자리를 떠날 궁리를 하십시오. 거기 오래 머물면, 당신의 인생은 거기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해야 할 깊은 열등감을 내부적 문제라고 한다면, 사회의 시각은 외부적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부적 문제는 열심히 실력을 쌓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너무 빠른 성취는 오히려 인간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실력과 관련해서는 이런 이야기도 하고 싶습니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정책 때문에 이제는 어디 가서 세계화니 국제화니 하는 이야기를 꺼내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사실입니다. 1997년 이후 우리 경제가 큰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제가 가장 안타깝게 느끼는 것은 바로 우리 문화기반의 붕괴입니다. 가뜩이나 부실하던 출판여건은 날로 열악해져 가고, 많은 출판사들이 도산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돈이 될만한 책만을 출판할 수밖에 없는 매우 절망적인 여건이 조성되게 되었지요. 물론 그 이전에도 우리 독서환경이 그다지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출판되고 있는 읽은 만한 책들은 대개 700페이지를 초과하고 있습니다. 이런 책들을 우리말로 번역하게 되면 거의 900페이지에 육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보통 한국에서 출판되는 책 한 권이 300페이지 내외임을 생각하면, 최소한 세 권 분량이 되는 셈이지요. 대부분의 전기, 역사, 정치 관련 기본 서적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읽을만한 책들은 도대체 번역이 될 수가 없습니다. 출판업자들이 그런 모험을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제가 미국에 와서 많이 놀랐던 것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책의 질은 논외로 친다 하더라도, 일단 양에서부터 이렇게 엄청나게 밀리고 있는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외국어를 습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절대적 독서량의 부족(또는 독서할 책의 절대적 부족)은 곧바로 절대적 지식의 부족으로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안 읽으면 되지 않느냐고요? 물론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가 국제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북한처럼 무지막지한 자립경제를 주장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매일처럼 외국인과 경쟁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장 터키에 물건을 팔러 간 두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한 명은 오직 한국인의 뚝심과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물건을 팔려고 하고, 다른 한 명은 터키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터키인들과 친구가 되려고 합니다. 누가 오랫동안 많은 물건을 팔 수 있을까요? 단기적으로는 뚝심과 추진력이 승리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방법이 바로 이런 식이었지요.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사람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우리 나라에는 아직도 터키에 대해 제대로 된 입문서가 한 권도 없는 겁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비로소 영어로 된 책을 통해서라도 터키를 배워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해외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 나라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무조건 예수천당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번역서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책의 선택권을 남에게 맡겨놓은 것과 같습니다. 잘 나가는 번역가 몇 사람의 입맛에 따라 선택된 책들만을 읽게 되는 셈이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여기서 가뜩이나 비정상인 외국어 공부 열풍을 부채질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목적도 없이, 영어단어를 외우고, 학원에 다니는 것만으로 영어를 잘 하게 될 수는 없습니다. 우선 재미가 없으니까요. 외국어 공부에도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터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유명한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www.amazon.com)에 들어가 관련 서적을 검색해 보십시오. 그 중 입맛에 맞는 책을 골라 직접 주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영어실력이 딸린다고요? 그래도, 아무 의미 없이 단어를 외우는 것보다는 관심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이 실력향상에 도움이 됩니다. 미국 신문들의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매일처럼 올라오는 서평을 검색해 보는 것도 좋은 책을 찾을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대학생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냐고요? 불행히도 세계의 많은 대학생들은 이런 식으로 책을 읽고, 이런 식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독일, 영국, 이스라엘, 캐나다, 스웨덴, 심지어는 에스토니아의 친구들까지도 인터넷을 통해 모두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영문판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대부분의 책들이 이미 영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판에 자기 혼자 "나는 00대학교 들어갔네"하고 목에 힘을 주며, 다른 대학에 간 친구들 앞에서만 유난히 많은 영어를 섞어 쓴다고 해서 세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국제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도 기독대학생에게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 신문들은 어제도, 오늘도 여전히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십들과 검찰 수사 뒷이야기에 촉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국제부 기자들도 고작 외국신문에 실린 기사들을 번역해서 알리는 수준에 그칩니다. 그나마, 국제관련 기사들은 늘 뒷전으로 밀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니 세계의 많은 대학생들이 열을 올려가며 토론하고 있는 커드(Kurd)족 문제에 대해 우리 학생들은 도대체 뭐가 뭔지 조차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코소보(Kosovo)에서 죽어가고 있는 무고한 양민들에 대해서도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넘어갑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앞으로 100년이 흘러도 우리 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대학 4년을 보낸 후, 국제시장에 내던져진 우리의 운명은 참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학시절부터 좀 더 멀리 바라보고 좀 더 많이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치 독일에 의한 홀로코스트가 막바지에 달하고 있을 때, 일본 외교관인 스기하라 셈포(Sempo Sugihara)는 독일 점령하의 리투아니아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유태인들에게 일본통과비자를 발급함으로써 그들의 생명을 구한 바 있습니다. 일본 정부의 명령을 어기고 감행한 이런 모험으로 인해, 외교관직을 박탈당하기는 했지만, 40여 년이 흐른 후 그는 동양인으로 유일하게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열방 중의 의인"으로 선정되어 오스카 쉰들러와 동일한 반열에 올랐습니다. 실제로 그가 구한 유태인 수는, 오스카 쉰들러가 구한 수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범한 그 많은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만은 좋은 이웃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스웨덴 외교관으로 비슷한 일에 생명을 걸었던 라울 왈렌버그(Raoul Wallenberg)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 인상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역사학자들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왈렌버그 앞에서는 고개를 숙입니다. 대학살이 벌어지는 동안 편안히 잠자던 수 억 기독교인들의 명예는 그와 같은 한두 사람에 의해 겨우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나는 우리 나라에도 이런 사람이 되고자 꿈꾸는 대학생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세계를 향해 눈을 드십시오.
학교 공부할 것도 많은데 어떻게 그런 다른 분야에까지 관심을 갖느냐고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다면 자신의 하루 시간 사용량을 잘 따져 보기 바랍니다. 저의 경우를 생각해 봐도,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거나 공부할 양이 엄청나게 많을 때는 오히려 매일 아침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생활을 게을리하지 않는데 반해, 시간이 남아돌 때는 기도도, 말씀도 멀리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결코 시간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문제는 시간을 잘 관리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밖에 대학시절 중에 좋은 스승을 만나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여기서 스승은 꼭 대학교수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배일 수도 있고 목사님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대학시절, 저의 큰바위 얼굴이 될만한 많은 스승들을 만났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변호하기 위해서, 낡아빠진 서류가방을 들고, 저소득층 거주지를 찾아다니는 기독인 변호사"의 모습을 눈에 선히 그려지게 만드셨던 법과대학의 김 교수님은 내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제대로 된 기독인 세 사람만 있어도 법조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던 그 분의 이야기는 진로문제로 고민하던 저의 가슴에 불을 질러 놓았습니다. 지금도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 분 한마디에 속아서 내 인생이 이 모양(?)이 되었어"라고 미소짓게 됩니다. 대학시절 내내 학문하는 기독청년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선배 김 판사님이나 송 변호사님도 그런 스승 중의 하나이고, 대학은 달랐지만 법신학에의 눈을 열어준 친구 진 전도사도 역시 나의 스승입니다. 대학 시절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길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소속 대학과 전공이 달라도 상관 없습니다. 어디엔가 훌륭한 스승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냥 찾아가십시오. 편지를 써도 좋습니다. 의외로 여러분이 놀랄 정도로 반갑게 맞아주는 그 분들의 모습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꿈을 가지고, 책 읽고, 공부하고, 교회 활동하고, 좋은 스승들과 교류하는 사람에게는 대학 등급으로 고민할 시간이 없습니다. 00대학이라는 학교 이름 안에 자기를 가두어 둘 여유도 없습니다. 개인의 출세를 위해 고시 공부하는 학생들도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쉬지 않고 공부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이 하루 5시간은 동아리 방에서 놀고, 나머지 3시간을 연애하는데 쓰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출세욕에 불타는 동료들을 욕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기독 청년은 공부를 해도 목숨을 걸고 해야 합니다. "공부하다 죽으면 그것도 순교"라는 말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