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봐/채희동

십자가와 걸레 그리고 성자어머니

leejoosuk 2008. 6. 20. 21:00

불감증에 걸린 현대인

바쁜 도시 생활에 쫓겨 사는 우리들은 어느덧 느끼고, 체험하고, 감탄할 수 있는 마음을 잃고 살아갑니다.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가장 큰 병은 다름 아닌 불감증입니다. 이들은 머리 속에는 많은 지식과 생각들이 있지만 자기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무감각할 뿐만 아니라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겨울산에 함박눈이 내려도, 눈꽃이 피어도, 그 아름다운 계절을 느끼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벌까 하는 머리만 쓰며 삽니다. 어릴 적에 눈이 내리면 들로 산으로 뛰어 달리며 연도 날리고 썰매를 타고 다녔는데, 요즘 아이들은 방에 갇혀서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돈을 주고받는 일회용 사랑에 익숙해져 사랑하는 님이 내게로 다가와 입맞춤을 해도 그 달콤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배고프고 헐벗은 가난한 이웃이 쓰러져 손을 내밀어도 무감각하게 그 자리를 지나갈 뿐입니다. 아프간에서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이 폭탄에 맞아 죽어 가는 것을 보고도 놀라지도 분노를 느끼지도 않습니다.

가슴과 머리로 살아가는 사람

그것은 현대인들이 무엇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가슴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해방신학자 중에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은 가슴(파토스)과 머리(로고스)로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먼저 가슴(파토스)으로 느끼고, 머리(로고스)로 판단해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먼저 가슴으로 느끼고 나서 저 산을 어떻게 오를 것인가 머리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머리가 먼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아, 저 여인은 참 아름답구나”하고 먼저 가슴으로 느낌이 팍 오지요. 그리고 나서 어떻게 저 여인의 전화 번호를 알아낼까, 어떻게 해서 만나자고 할까 등등 머리 속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슴 없이 머리로만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 여자가 돈도 많고 집안도 좋고 내 출세에 지대한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한번 꼬셔봐야지.” 그러나 그런 만남은 100% 불행해 지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것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할 때도 먼저 머리로 계산을 하고 나서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뭔가 필이 오고 나서 나중에 머리로 계산을 하고 수지가 맞으면 행동으로 옮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람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먼저인 것입니다.

머리로만 살아가는 사람

오늘날 현대인들은 가슴은 잃어버리고 머리만 남았습니다. 정치인들이 그렇습니다. 국민의 아픔, 국민의 걱정거리, 국민의 바램은 아랑곳하지 않고 온통 당리당략에 골몰하며 사는 인간들이 정치인입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까지도 머리만 비대해졌습니다. 십일조를 하고 헌금을 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문에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러 감옥에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머리로 살아가는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부모들은 자식들을 모두 머리만 뛰어난 사람으로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비싼 과외를 보내고 학원을 보내고 해서 가슴은 한없이 빈약하면서 머리만 비대한 아이들을 만들려고 합니다. 나중에 그런 아이들이 성장하면 또 머리로만 살아가게 되고 부모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

신앙인은 모름지기 머리보다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슴으로 산 대표적인 신앙인은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그는 로고스로 산 사람이 아니라 파토스로 산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로부터 외투 하나 물려 입었을 뿐 가난과 결혼해서 평생을 청빈하게 산 파토스의 사람이었습니다. 들꽃과 이야기를 하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향기를 맡았으며, 자기를 온전히 비워 그리스도를 닮아가려 했습니다. 가슴으로 산 그를 사람들은 성자라고 칭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시퍼런 국가보안법이 살아있고 철조망이 가로막혀 있지만, 홀로 휴전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넘어서는 안되고, 넘을 수 없다고 여기는 휴전선 철조망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남과 북의 분단선을 훌쩍 넘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늦봄이 머리로 행하는 일이 아니라 가슴으로 넘은 것입니다. 이렇게 가슴으로 분단선을 넘은 그에게 사람들은 통일의 사도라고 칭했습니다.

이 땅에 어머니들은 머리로 살지 않고 가슴으로 사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어린 자식과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살아왔고, 그 힘으로 이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었습니다. 이 어머니들은 예수를 믿어도 머리를 써가며 잔꾀를 부리며 믿지 않고 두 무릎으로 예수를 믿었습니다. 한국의 새벽기도는 어머니들의 가슴으로 정성을 드리는 성소가 되었습니다.

옛날 인디언들은 넓은 초원을 말을 타고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다가 초원 한가운데 말을 세워 놓고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머리와 몸이 너무 앞서와서 아직 쫓아오지 못한 가슴과 영혼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성이란 머리와 가슴이 일치하는 것, 너무 앞서간 머리를 잠시 식혀 아직 오직 못한 가슴을 기다리는 것이 바로 신앙훈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슴과 십자가, 그리고 걸레

머리를 주로 쓰는 사람은 손이 게을러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습니다. 참 가슴의 소유자만이 십자가를 능히 짊어질 수 있습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은 손이 먼저 나가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가슴으로 느끼고 바로 손이 나아갑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이것저것 궁리한 끝에 자기에게 이로울 때만 손이 나갑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 머리가 좋은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고, 도마는 주님을 의심했습니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서 손과 발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대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그나마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고 희망이 있는 것은 머리로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손과 발로, 따스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구체적인 모습을 땟구정물이 줄줄 흐르고 갈기갈기 떨어지고 방 한구석에 내팽개쳐진 걸레에게서 봅니다. 우리 시대에 십자가는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더럽고 오염된 곳을 닦아내는 걸레입니다. 십자가가 죄 많은 우리를 회개하게 해 주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듯이, 걸레는 자기를 희생하여 더러운 곳을 닦아 세상을 아름답게 해 줍니다.

안도현이라는 시인이 쓴 글중에 아주 짧은 시가 하나 있습니다.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는 건
걸레가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기 몸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방안을 깨끗하게 하는 걸레처럼,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으신 분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언제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늘진 곳에 홀로 앉아 걸레처럼 가족을 위해 헌신할 뿐입니다. 차가운 마루 한 구석에 던져져 얼어 비틀어진 걸레가 바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강남향린교회에서 걸레를 가장 많이 들고 있는 부서가 어디입니까? 바로 여신도회입니다. 여신도 회원들은 교회의 구석구석을 걸레를 들고 다니면서 닦고 닦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위하지 않고 어린이부 어린이에서부터 나이 드신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보살필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그늘지고 소외된 이들까지 살피고 따스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합니다. 아마도 여신도회가 없다면 오늘날처럼 강남향린교회가 아름답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걸레와 성자 어머니

여러분들도 걸레질을 한두 번 해보아서 잘 알겠지만, 허리를 굽히고 두 무릎을 꿇고 한 손을 집고 걸레질을 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제 어머니가, 제 아내가 집에서 걸레질을 하는 것을 보노라면, 차라리 ‘저것은 기도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가끔 걸레질을 좀 해 보는데 그것은 기도하는 것보다 더 힘이 듭니다.

마치 중세 수도사들이 두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며 참회하는 심정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 어머니가 걸레를 들고 바닥을 닦고 벽을 닦고 유리창을 닦아 집안을 아름답게 닦는 걸레질이야말로 거룩한 종교적 수행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찾고 따라야 할 거룩한 이, 곧 성자를 먼 곳에서 찾지 않습니다. 바로 제 어머니가 성자요, 제 아내가 성자요, 바로 걸레를들고 더러운 곳, 그늘진 곳을찾아가 따스하게, 아름답게 닦아주는 여러분들이 성자이십니다. 성자란 누구입니까?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희생

하고 자기를 헌신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과 평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이 아닙니까? 바로 걸레처럼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여 하늘의 평화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오늘 성서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평화를 이루려 헌신하는 걸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대에 우리가 주님을 믿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직접 걸레를 들고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닦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지극히 인간적인종교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우리 에게 해탈(解脫)이나 도통(道通)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뿐입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내 십자가는 누가 지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당신이 직접 짊어지고 가셨듯이, “너도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내가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내가 내 십자가를 나 자신이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하는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 의 핵심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지셨으니 나는 안 져도 된다, 예수께서 대신 지신 십자가로 나는 가만히 앉아 기도만 하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십자가는 있지만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갈 참다운 신앙인은 없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교회에는 예수의 십자가는 사라졌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과 헌신의 삶 없이 영광과 축복만을 부르짖는 교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사칭하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 불과합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없고, 예수의 삶이 없고,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는 한국교회, 오직 예수의 보혈의 피만 부르짖는 교회에서 우리는 예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상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걸레가 되어야 할 교회

교회는 이 세상에 걸레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고 내어놓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닦고 닦는 걸레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은 어느 날 갑자기 성령의 불을 받아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면서, 우리가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걸레가 되어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걸레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신앙은 타력적, 이타적, 의존적 신앙이 아니라 자력적, 주체적 신앙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진정제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삶의 고통을 잠시 잃게 해주는 각성제, 진통제가 아닙니다. 삶의 깊은 문제들에 대하여 즉각적인 해답을 주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친히 두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것, 걸레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걸레로 오셨습니다. 죄 많고 더러운 마음을 가진 우리 인간 세상에 오셔서 하늘의 말씀으로 우리를 닦아주시고, 병들고 힘없는 이들을 다시 세우시고, 마침내 십자가를 친히 짊어지심으로 우리에게도 걸레와 같은 삶을 살아 이 세상을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로 가꾸라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걸레로 마음을 닦아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삼으십시오

사랑하는 강남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걸레의 삶을 살아 가야 할 우리에게 가장 잘 닦아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그 곳은 다름 아닌 우리의 마음입니다.마치 우리의 어머니가 신새벽에 장독대에 올라 아주 깨끗한 하얀 걸레로 장독을 정성을 다해 닦아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닦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닦고 닦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질그릇이지만, 그 질그릇 안에 보화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계십니다. 내 마음이 더럽고 오염되어서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뿐 주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계십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의 마음을 말씀의 걸레로 닦고 닦으면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의 모습을 밝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여러분은 거룩하고 신령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를 이 세상에 속해 있으나 모두들 하늘의 시민권자들이라 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하는 일은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거룩한 일입니다. 삶의 성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걸레가 온전히 자기를 비워 주님을 모시는 삶을 사는 것처럼, 사랑하는 여러분의 삶도 성자 걸레처럼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희생의 삶을 통해 더러운 곳, 그늘진 곳, 아프고 고통받는 곳으로 가서 친히 자신이 걸레가 되어 그들을 닦아주고 위로 해주고 치유해 주고, 그래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나가시는 여신도회와 강남향린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