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산다는 것
인도 사람들은 사람에게 제일 어려운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 첫째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윤회설을 믿기에 영원히 돌아가는 윤회 속에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몇 천년, 아니 몇만 겁에 한번 얻은 기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네들은 자살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람으로 한번 태어나기가 얼마나 힘든데 자살해서 그것을 허비하느냐는 것이지요.
이들이 그러한데 지금을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지 돌아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정말 고맙게 소중하게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내가 하필이면 이런 때에, 이렇게 태어나서 이런 고생을 하느냐며 신세타령과 원망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낳아준 부모를 원망하고, 내 외모, 내 성격, 내가 가지고 있는 질병을 탓하면서 소중한 시간, 절호의 찬스를 낭비하고 있지 않은지요.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천우신조의 기회, 하늘의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뜻이 있어 온 세상입니다.
피조물 중에 사람만이 내면의 세계가 있고 그것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내면의 세계는 모른채 곤충이나 동물들처럼 바깥세계만 살다가 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로만 살다고 진정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죽음에 삼키운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이 두신 신성, 하늘의 빛이 있는데 말입니다.
성경 창세기는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인지 알고, 그 형상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다음으로 어려운 것이 스승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눈을 가지는 것도 어렵지만 그런 마음의 눈을 얻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더 어렵다는 거지요.
우리는 생에 예수님을 알고 그 사랑을 만나 하나님을 만나는 길, 방법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지요.
믿음은 그 세계를 여는 통로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부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바울을 만나야 하고, 루터를 만나야 하고, 웨슬레를 만나야 하고, 목사를 만나야 합니다.
나에게 그런 빛을 전해주는 스승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길이 없습니다.
성경은 또 이것을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겠느냐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아니, 다른 말로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통로, 선생님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우리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를 통해, ‘그 일’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사람에게 이미 보여주셨다고 하셨지요.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나 또 하나님을 알고 만나뵙고 있으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요.
또 우리는 그런 감사와 기쁨, 감격으로 살아 우리의 삶을 가장 멋진 하늘의 작품으로 가꾸어가는 삶의 예술가들입니다.
그 복음을 기억하고 깨어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